가볍고 감성적인 디자이너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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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b Girl – 호프 자런

긴 시간동안 정체된 머릿속에서, 가끔 기회를 만들어 몇 개월간 읽은 책.
평소라면 흥미를 가지며 빨리 읽었을테지만 오래 걸렸다. 그만큼 일상 같았고, 그 안의 글들이 머릿속에 새겨졌다.

마음에 들었던 부분들을 옮겨 적는다.
아래의 내용에서 지은이가 실험실에 대해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고,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얼마나 속속들이 알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물론 아래 내용 이후로도 지은이의 실험실에 대한 이야기는 길게 이어진다.

내 실험실은 손으로 하는 일에 모든 정신을 집중해서 뭔가를 해내는 곳이다. 내 실험실은 내가 움직이고, 서고, 걷고, 앉고, 물건을 가져오고, 나르고, 오르고, 기는 곳이다. 내 실험실은 잠을 이루지 못해도 괜찮은 곳이다. 자는 것 말고도 할 일이 많은 세상이기 때문이다. 내 실험실은 내가 상처받고 다치면 문제가 되는 곳이다.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경고문이 붙어 있고, 규칙이 정해져 있다. 장갑을 끼고, 보호 안경을 쓰고, 발가락을 감싼 신발을 신어서 위험한 실수로부터 나를 방어하는 곳이다. 내 실험실은 내가 필요한 것보다 가진 것이 훨씬 많은 곳이다. 서랍들은 언젠가 필요할지 모르는 물건들로 가득하다. 내 실험실의 모든 물건들은(그것이 아무리 작고 못생겼어도) 존재 이유가 있다. 아직 그 용도를 아무도 알지 못할지라도.
내 실험실은 내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한 죄책감이 내가 해내고 있는 일들로 대체되는 곳이다. 부모님께 전화하지 않은 것, 아직 납부하지 못한 신용카드 고지서, 씻지 않고 쌓아둔 접시들, 면도하지 않은 다리 같은 것들은 숭고한 발견을 위해 실험실에서 하는 작업들과 비교하면 사소하기 그지없는 일이 된다. 내 실험실은 아직 내 안에 있는 어린이가 모습을 드러내는 곳이다. 그곳은 내가 가장 친한 친구와 노는 곳이다. 내 실험실에서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도 안되는 짓을 할 수도 있다. 그곳에서는 1억 년 된 돌을 분석하기 위해 밤을 새워 일할 수도 있다. 아침이 되기 전에 그 돌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 알아내야만 하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면서 나에게 밀어닥친 그 모든 어리둥절하고 달갑지 않은 일들(세금 신고, 자동차 보험, 자궁경부암 검사 등)은 실험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아무 상관도 없어진다. 전화기가 없는 그곳에선 아무도 내게 전화하지 않아도 마음 상하지 않는다. 문은 항상 잠겨있고, 열쇠를 가진 사람은 모두 아는 사람들이다. 바깥 세상이 실험실로 들어올 수 없기 때문에 실험실은 내가 진짜 아닐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p.35-36

아래 내용에서는 과학자들의 생각의 한 켠을 엿볼 수 있다. 용어에 대해서도 과학자들은 어떻게 생각을 하는지, 특히 자신의 작업물에 대한 새로운 이름을 짓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고 숭고하게 대하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일을 진행하고 결과를 내는 자세에 대한 부분은 너무나도 명쾌해서 머릿속에 꼭 담아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추측 대신 가정을. 결정 대신 결론을.

“근데 기계 이름은 뭐라고 지을까?” 성공에 힘을 얻은 빌은 재미있는 축약어를 생각해내는 브레인스토밍을 하고 싶어 했다. “‘니켈을 촉매로 한 불균형 반응’이라는 개념이니까 ‘촉매작용을 하다catalyze’라는 단어에서 CAT을 가져올 수는 있을 것 같아.”
세상의 어느 작가도 과학자들만큼 단어 몇 개를 두고 머리를 쥐어짜지는 않을 것이다. 용어가 가장 중요하다. 우리는 이미 받아들여진 이름으로 물질이나 현상을 식별하고, 보편적으로 합의된 용어를 사용해서 그 물질이나 현상을 묘사하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연구한 다음 배우는 데 몇 년씩 걸리는 암호를 사용해서 연구에 관해 글을 쓴다. 자신이 한 일을 논문으로 쓰면서 우리는 ‘가정’을 하지 절대 ‘추측’하지 않고, ‘결론’을 내리지 절대 그냥 ‘결정’하지 않는다. ‘의미가 있다’는 단어는 너무나 모호해서 쓸모없을 정도지만, 거기에 ‘커다란’이라는 단어를 앞에 붙이면 50만 달러의 연구 기금을 끌어올 수도 있다.
새로운 생물의 종이나, 새로운 무기물, 새로운 소립자, 새로운 분자, 혹은 새로운 은하계에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권리는 어느 과학자든 바라 마지않는 가장 높은 명예이자, 위대한 임무이다. 각각의 과학 분야는 이름 짓는 관습에 적용되는 엄격한 규칙과 전통을 가지고 있다. 지금 막 발견한 새로운 것에 대해 알고 있는 것과,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지식을 총동원한 다음 지금까지의 기억 속에서 자신을 미소 짓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가려내서 현대적이면서도 영구한 이미지를 암시하는 표현을 생각해내면 마침내 그 소중한 대상에 세례명을 붙일 수 있다. 그러고는 이 서투르게 이름 짓는 결과의 작은 부분이라도 앞으로 영원히 변치 않고 받아들여질지 모른다는 가망 없는 염원을 한다. 그러나 그날 밤, 내 머리는 거의 뇌사 상태여서 이런 말잔치를 벌일 기력이 없었다. 집에 가서 자고 싶을 뿐이었다.
p.44

아래 내용은 제주도의 서귀포 자연휴양림 깊숙한 벤치에서 읽었다. 키 큰 나무들의 숲 속에서 읽고 있으니, 나무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숲이 정말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장을 읽고서 산책을 하다가 바위틈에 뿌리를 내린 도토리 열매를 보았는데, 그 녀석이 과연 잘 성장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응원을 하고 왔다.

첫 뿌리가 감수하는 위험만큼 더 두려운 것은 없다. 운이 좋은 뿌리는 결국 물을 찾겠지만 첫 뿌리의 첫 임무는 닻을 내리는 것이다. 닻을 내려 떡잎을 한곳에 고정시키는 순간부터 그때까지 누리던 수동적인 이동 생활에 영원히 종지부를 찍게 된다. 일단 첫 뿌리를 뻗고 나면 그 식물은 덜 추운 곳으로, 덜 건조한 곳으로, 덜 위험한 곳으로 옮길 희망(그 희망이 아무리 미약한 것이었다 할지라도)을 포기해야한다. 서리와 가뭄과 굶주린 입이 찾아와도 그로부터 도망갈 가능성 없이 모든 것을 직면해야 한다. 그 작은 뿌리는 자기가 앉아 있는 그 장소에 몇 년, 수십 년, 혹은 수백 년의 미래에 어떤 일이 생길지를 점칠 기회를 딱 한번 가진다. 뿌리는 그 순간의 빛과 습도를 감지하고 자기 속에 내재된 프로그램으로 그 정보를 점검한 다음 글자 그대로 몸을 던져 뛰어든다.
종피(씨의 껍질)에서 첫 배축(식물의 배에서 중심축을 이루는 부분-옮긴디) 세포가 자라나는 순간 모든 것을 건 도박이 시작된다. 싹이 자라기 전에 뿌리가 먼저 내리기 시작하기 때문에 엽록소에서 양분을 만들어내기까지는 며칠, 때로는 몇 주를 기다려야 한다. 뿌리를 내리는 작업은 씨 안에 들어 있던 마지막 양분을 모두 소진시킨다. 모든 것을 건 도박이고, 거기서 실패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성공할 확률은 100만분의 1도 되지 않는다.
p.81

아래 내용은 꼭 사람의 삶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명은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 그리고 스트레스는 위기가 아니라 삶의 순환에서 일상적으로 겪는 문제의 일부일 뿐이라는 것. 대신 사람은 가능한 범위 내에서 발을 움직여, 생각을 움직여 이동을 할 수 있다. 그것에라도 감사해야 하겠다.
그리고 식물들은, 선인장은 항상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자랄 수 있는 해에만 자란다는 것. 나는 환경은 그렇게 주어지지 않는데 너무 성장해야한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게 도태일까.

선인장은 사막이 좋아서 사막에 사는 것이 아니라 사막이 선인장을 아직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사는 것이다. 사막에 사는 식물은 어떤 식물이라도 사막에서 가지고 나오면 더 잘 자란다. 사막은 나쁜 동네와 많은 면에서 비슷하다. 거기서 사는 사람은 다른 곳으로 갈 수가 없어서 거기 사는 것이다. 물은 너무 적고, 빛은 너무 많고, 온도는 너무 높은 상태. 사막은 이 모든 불편한 조건을 극대화해서 가지고 있는 곳이다. 생물학자들은 사막을 많이 연구하지 않는다. 식물이 인간 사회에 가지는 의미는 세 가지뿐이기 때문이다. 식량, 의약품, 목재. 이 세 가지 중 어느 것도 사막에서는 얻을 수가 없다. 그래서 사막 식물을 연구하는 과학자는 정말 흔치 않고, 그렇게 하는 과학자는 종국에 가서는 자기 분야의 비참함에 이골이 나고 만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런 고통을 날마다 견뎌낼 자신이 없다.
사막에서는 생명을 위협하는 스트레스는 위기가 아니다, 그것은 삶의 순환에서 일상적으로 겪는 문제의 일부일 뿐이다. 극도의 스트레스는 환경의 일부일 뿐이지 식물이 피할 수 있거나 개선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선인장의 생존 여부는 치명적인 극도의 건기를 반복적으로 견뎌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무릎까지 오는 정도 키의 원통 선인장이면 적어도 25세 이상 된 녀석이다. 선인장들은 사막에서 천천히 자란다. 그것도 자랄 수 있는 해에만.
p.203

아래 내용은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모두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주었다. 가끔 글을 읽다가 혹은 문득 생각이 나서 떠올리게 되는 경우들이 있지만 항상 머릿속에 담아두지는 못한다. 나무는 서로에 대한 감정과 관심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동물들도 마찬가지고, 물론 사람 사이에도 마찬가지고, 겹겹이 쌓인 다양한 감정과 생각들이 서로 다른 범위에서 상호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몇 년에 걸친 관찰 끝에 연구원들은 위의 현상을 설명하는데 땅 위의 신호체계가 가장 설득력 있는 가설이라고 결론지었다. 과학자들도 나무들이 사람이 아니고, 감정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사람에 대한 감정이 없다는 말이다. 우리를 향해서는. 그러나 어쩌면 서로에 대한 감정과 관심은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위기가 닥치면 나무들은 서로를 돌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트카 버드나무 실험은 모든 것을 바꾼 아름답고도 훌륭한 연구의 예다. 문제가 하나 있기는 했다. 그 연구 결과를 사람들이 믿기까지 20년이 넘는 세월이 필요했다는 사실이다.
p.240-241

아래 내용에서 도구에 대한 멋진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사람은 도구를 사용하고, 도구는 사람이 만든다. 요즘 시대에 대부분의 도구들은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일반적으로 쓰일 수 있는 정형화된 물건들에 가깝다. 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목수는 자신의 도구를 자기가 만들어 사용하고, 신발을 만들거나 가죽으로 물건을 만드는 사람들도 도구나 틀을 자신에 맞게 만들어 사용한다. 디자인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이고, 내가 무엇인가 하는 일에도 마찬가지이다. 어쩌면 간단한 스크립트를 짜서 무언가 나의 일에 도움이 되는 도구를 만들 수 있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 일 것이다.

체중계와 우체국 저울은 서로 다른 방법으로 동일한 목적, 즉 동일한 형태의 측정을 하도록 만들어진 두 가지 다른 기계다. 계속 스펙트럼에 주목해보자. 가령 두 세트의 원자의 무게를 알고 싶고, 중성자가 몇 개 더 들어간 세트 쪽이 얼마나 더 무거운지를 알고 싶다고 하자. 그 무게를 잴 수 있는 기계를 만들어야 한다. 좋은 소식은 이런 기계는 한 번만 만들면 된다는 사실이다. 이런 물건으로 집에서 체중을 잰다든지 정부 기관에서 편지 무게를 재겠다고 우리에게 제작 요청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계는 미워도 되고, 엉뚱해도 되고, 쓰기 불편해도 되고, 비효율적이어도 된다. 그냥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기계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과학 연구를 위한 기구들은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다
필요로 인해 시작된 창조 과정은 무척 재미있고 괴팍한 결과로 이어지고, 그것을 만드는 사람에 따라 독특한 성격을 띤다. 모든 예술 작품과 마찬가지로, 이 과학적 창조물들도 시대의 영향을 받고, 그 시대에 직면한 문제 해결을 시도하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또 모든 예술 작품과 마찬가지로, 과학적 창조물도 그 덕분에 가능해진 미래의 시각에서 보면 구식이고 고물로 보이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하던 일을 멈추고 선배 과학자들의 손길이 닿은 이런 창조물들을 들여다보면 독특한 매력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고, 지엽적인 요소에까지 세심한 신경을 쓴 것을 보고는 점묘화에서 수평선 멀리 있는 작은 배를 표현한 수백 번의 붓 자국을 볼 때와 마찬가지로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p.266-267

아래 내용은 완벽히 공감되지는 않지만, 언젠가는 나도 깨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서 항상 신뢰할 수 있는 한 가지 요소를 찾아내 그것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 어쩌면 생각 일 수도 있고, 자연의 어떤 것일 수도 있고, 누군가 일 수도 있겠다.

북쪽 지방에서 자라는 나무들의 대부분은 겨울 여행을 할 준비를 잘 해내므로, 서리 때문에 죽는 경우는 극도로 드물다. 가을 날씨가 따뜻하건, 춥건 상관없이 경화 과정은 시작된다. 기온의 변화가 아니라 24시간의 순환주기 중 빛이 존재하는 시간이 감소하는 것을 감지해서 낮이 점점 짧아지는 것을 알고, 월동 준비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한 해는 온화했다가 한 해는 혹독했다가 하는 식으로 겨울 기온은 변덕을 부리더라도 가을에 낮이 짧아지는 변화는 해마다 똑같다.
빛을 가지고 한 여러 건의 실험을 통해 이 ‘일광’의 변화가 나무들의 경화 과정을 촉발한다는 것이 증명됐다. 인공 빛을 가지고 나무를 속이면 이 경화 과정은 7월에도 시작될 수 있다. 날씨는 변덕을 부릴 수 있지만, 언제 겨울이 올지 알려주는 태양은 신뢰할 수 있기 때문에 억겁의 세월 동안 나무들은 경화 과정에 의존해 겨울을 날 수 있었다. 식물들은 세상이 급속도로 변화할 때 항상 신뢰할 수 있는 한 가지 요소를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p.276

아래 내용은 살아가면서 지나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든다. 행복과 기쁨, 화, 슬픔과 같은 감정들이 너무 쉽게 스쳐가고 잊혀지는 것이 아닌가. 어떤 것들은 일부러 감정을 억눌러 작은 감정으로 기억되는 것은 아닐까.

빌은 나를 의미심장하게 들여다보는 것으로 내 머릿속에서 벌어지던 대화를 중단시킨 다음 말했다. “모든 걸 잃은 건 아냐. 전부 다 기록했잖아. 다시 시작하면 돼. 생각해보면 이번 여행에서 한 일이 굉장히 많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가지 않아 그의 비행기에 탑승하라는 방송이 나왔고, 나는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 또 내게서 떨어져 나가는 느낌을 그날 두 번째 받았다.
나는 빌의 비행기가 후진을 한 다음 활주로로 가는 것을 보면서 내 인생에서 더 중요한 것일수록 더욱더 말로 표현되지 않고 지나쳐가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는 아일랜드 남서부의 식물분포도를 꺼내서 지형 지도와 비교해가며 이끼를 더 많이 찾을 수 있는 곳을 체계적으로 표시하기 시작했다.
p.360

아래 내용도 살아가는데 잊지 않고 되새기고 싶은 것이었다. 언제나 넘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는 것, 나의 의지와 달리 물러나주어야 할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지속적으로 나를, 주변을, 관계를 가꾸어주어야 한다는 것.

식물을 다루다 보면 자주 겪는 일이 시작과 끝을 구분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식물은 반으로 갈라놔도 뿌리는 몇 년을 더 살 수 있다. 위를 모두 잘라낸 나무의 둥치는 다시 온전한 나무로 자라기 위한 시도를 매년 하고 또 한다. 둥치 안쪽은 잠든 싹으로 가득하다. 겉에서 보는 것보다 거의 두 배나 되는 싹들이 깨어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싹은 줄기로, 줄기는 잔가지로, 그중 운이 좋은 잔가지는 굵은 가지로 크고, 건강한 굵은 가지는 몇 십 년을 버티면서 결국 이전만큼 녹음이 우거진 나무로 성장한다. 어쩌면 누군가가 베어버리려고 한 것 때문에 더 우거진 나무가 될지도 모른다.
..
그러나 나무는 그것 말고도 다른 데 이 영양분을 써야 할 곳이 많다. 늙은 이파리들을 대체하고, 감염된 곳을 치료하는 약도 만들고, 꽃과 씨앗도 생산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동일한 원자재를 사용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자원이 남아도는 일이라고는 없다. 그런데 이 자원을 찾기 위해 위로 아래로 뻗는 데엔 한계가 있다. 결국 충분한 높이, 충분히 깊게 뻗지 못한 가지와 뿌리는 그 영양분들을 확보하기 위해 쓰는 자원보다 얻을 수 있는 자원이 더 적어지는 시점에 도달하게 된다. 일단 환경의 제한을 넘어서게 되면 나무는 모든 것을 잃는다. 주기적으로 가지치기를 해줘야 나무를 보존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마지 피어시(미국의 소설가, 페미니스트)가 말했듯 삶과 사랑은 버터와 같아서, 둘 다 보존이 되질 않기 때문에 날마다 새로 만들어야 한다.
p.384-385

  • Published: 1 week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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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

그해 봄에
– 박준

얼마 전 손목에 깊게 그은 당신과
마주 앉아 통닭을 먹는다

당신이 입가를 닦을 때마다
소매 사이로
검고 붉은 테가 내비친다

당신 집에는
물 대신 술이 있고
봄 대신 밤이 있고
당신이 사랑했던 사람 대신 내가 있다

한참이나 말이 없던 내가
처음 던진 질문은
왜 봄에 죽으려 했냐는 것이었다

창밖을 바라보던 당신이
내게 고개를 돌려
그럼 겨울에 죽을 것이냐며 웃었다

마음만으로는 될 수도 없고
꼭 내 마음 같지도 않은 일들이
봄에는 널려 있었다


– 박준

오늘은 지고 없는 찔레에 대해 쓰는 것보다 멀리 있는 그 숲에 대해 쓰는 편이 더 좋을 것입니다 고요 대신 말의 소란함으로 적막을 넓혀가고 있다는 그 숲 말입니다 우리가 오래전 나눈 말들은 버려지지 않고 지금도 그 숲의 깊은 곳으로 허정허정 걸어 들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쯤에는 그해 여름의 말들이 막 도착했을 것이고요 셋이서 함께 장마를 보며 저는 비가 내리는 것이라 했고 그는 비가 날고 있는 것이라 했고 당신은 다만 슬프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그 숲에 대해 더 쓸 것이므로 슬픔에 대해서는 쓰지 않을 것입니다 머지않아 겨울이 오면 그 숲에 ‘아침의 병듦이 낯설지 않다’, ‘아이들은 손이 자주 벤다’ 라는 말도 도착할 것입니다 그 말들은 서로의 머리를 털어줄 것입니다 그러다 겨울의 답서처럼 다시 봄이 고 ‘밥’이나 ‘엄마’나 ‘우리’ 같은 몇 개의 다정한 말들이 숲에 도착할 것입니다 그 먼 발길에 볕과 몇 개의 바람이 섞여들었을 것이나 여전히 그 숲에는 아무도 없으므로 아무도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

  • Published: 1 week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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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수길 라곰

해질녘. 꾹꾹 눌러쓴 편지 한 편을 들고, 골목의 주택으로 들어간다. 반짝이는 방, 작은 테이블, 의자와 이름표. 열심히 일하는 에어컨과 선풍기. 각자가 들고온 맥주와 소소한 음식들로 가득한 테이블. 어색하지만, 대화로 금세 친해지는 사람들. 수시로 바뀌는 이야기의 주제, 의견, 토론, 가벼운 농담들.

 

같은 동네의 자기 집으로 돌아가듯 한명씩 가벼운 인사와 함께 돌아가고, 남은 사람들은 늦은 새벽까지 이야기 꽃 풍경을 만든다. 깜깜한 밤 달빛 아래 반딧불이들의 풍경같기도 하다.

 

어느 날, 영화를 보고 난 후. 잠시 밖에 나간 사이, 누군가들은 맘마미아2를 보러간다며 그 음악을 듣고있더라. 부르고도 있더라. 초인종을 누르고 들어가보니, 춤도 추고 있더라. 이런 사람들.

  • Published: 4 week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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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어제의 일. 어제는 친구와 영화를 보고, 와인을 마셨다. 영화는 나의 추천으로, ‘어느 가족’. 영화관은 친구의 추천으로, ‘필름포럼’이라는 작은 영화관을 갔다. 아담한 영화관에서 적당한 사람들이 모여앉아 작은 스크린을 보며 ‘어느 가족’을 보았다. 피로 엮이지 않은 어느 가족, 행복한 결말을 예상했지만 그리 행복한 결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름다운 장면들이 많았다. 특히 밤에 옹기종기 마루에 모여앉아 불꽃놀이를 보는 장면. 불꽃놀이는 보여주지 않고 하늘에서 그 가족은 담은 풍경은 정말 멋졌다.

영화를 보고 나서는, 합정의 ‘파리 살롱’이라는 와인가게에 갔다. 주택가에 있는 작고 이쁜 가게. 영화관도 와인가게도, 평소 내가 접하던 것들과는 거리가 좀 있었는데, 나도 참 모르고 살았구나 하고 생각했다. ‘파리 살롱’은 언젠가 또 다시 가리라.

오늘의 일. 오늘은 일이 별로 없었다. 낮에 일어나 부모님 집에가서 밥을 먹고 돌아와 저녁부터 밤까지 집에서 이것저것 한 일. 미스터선샤인을 보며, 얼마전 꽃꽂이 수업에서 만든 꽃병의 꽃들을 빼내어 정리한다음 묶음으로 만들어 벽에 걸어주었다. 그리고 마음의 짐처럼 계속 나를 따라다니던 짐 중의 하나, 오토바이 프라모델을 완성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꺼내어 조립을 하기 시작했다. 조립이라기보다는, 일단 오늘은 색을 칠했다. 내일부터 조금씩 해야지.

조금씩, 다시 살아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역시 나는 무언가 만드는 일을 해야 살아나는 것 같다. 최근에 가장 많이 쓰는 툴은 엑셀과 워크플로위고, 가장 많이 만드는 것은 숫자로된 결과와 목록화 된 문장들인데, 그것보다는 손을 사용해서 무언가 손에 잡히는 것을 만드는게 역시 나에게는 맞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면서, 머릿속에 막혀있던 생각이 굴러가는 통로들이 조금씩 열리는 느낌이다.

계절이 바뀌고 있어서 그럴 수도 있겠다.

  • Published: 4 week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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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길 풍경

치마를 나풀거리며 한 여자가 자전거를 타고 앞을 지나간다.
페달에 힘을 주어 힘겹게.
손목도 힘이 부친지, 갸우뚱거리며 일자로 이어진 자전거길을 헤쳐간다.
잔잔한 풍경 속에서 힘을 주어 헤쳐간다.

귓가에는 아까부터 Lover, please stay가 들려온다.

  • Published: 3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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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루아 밀크

요즘엔 퇴근하고 집에와서 밥을 먹고 씻으면 너무 졸리고 피곤하다. 씻고 밥을 먹으면 더 졸려서 일단 먹고 씻기로 했다. 하지만 그래도 졸리긴 마찬가지다. 가끔 자전거를 타고 나가면 나에게는 조용하고 멍했던 밤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활기찬 저녁과 같다는걸 느낀다. 하지만 장마가 시작되고 나서는 그마저도 못한다. 그런데 오늘 잠이 오지 않는 방법을 발견했다. 밥을 먹고 씻고 깔루아 밀크를 한잔 하면 잠이 싹 가신다. 그래서 오늘은 밥먹을 때부터 영화를 보기 시작해서, 깔루아 밀크를 홀짝거리며 영화를 보다가, 새로 프린트한 물건에 가죽을 대고 바느질을 하며 영화를 다 보았다.

그런데 또 생각이 나서, 깔루아 밀크를 한잔 더 만들어서 홀짝홀짝 마시며 음악을 듣는다. 라디오를 듣다가 알게 된 Nothing But Thieves의 Nothing But Thieves의 앨범을 계속 듣는다. 새로 이사한 집, 맥에 연결된 스피커와 Apple Home으로 연동되어있는 스피커 두 대가 0.2초 정도의 delay를 가지고 서로 노래를 부른다. 기술의 부족함이겠지만, 꼭 콘서트장에서 듣는 느낌이다. 깔루아 밀크를 홀짝홀짝 마시며, 오랜만에 말짱한 밤을 보낸다.

  • Published: 3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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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스트 하우스

조용한 해변가 마을, 창가에서 주황 불빛이 새어나오는 네모네모난 이층 집. 홀로 찾아온 여행객들이 하나 둘 모인다. 어색한 듯 어색하지 않은 듯,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태어나 처음 만나 한 식탁에 모여앉는다. 시작은 도란도란 함께 마실 맥주를 살 돈을 마련하기 위한 게임. 아, 조금 늦은 여행객이 도착했다. 내가 주인인 것 마냥 문을 열어준다.

맥주를 홀짝홀짝 마시며, 다녀온 여행지를 이야기하고, 내일 아침 갈 곳을 이야기하고, 버스를 탈 곳을 이야기한다. 첼로를 연주하는 사람, 해외영업을 하는 사람, 법무팀에 있는 사람,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 임상심리학을 연구하는 사람… 몇 안되는데 참 다양한 사람들. 서로의 이야기를 유심히 듣는 사람들. 이야기를 나누며 깊어가는 밤.

깊어가는 밤. 갑자기 다들 트럭에 몸을 싣고 깜깜한 마을 골목을 지나 외곽으로 향한다. 음악을 크게 켜고 몸은 트럭의 움직임에 맞춰 기우뚱 기우뚱. 입구를 막아 놓은 의자를 잠시 옆으로 옮기고, 다시 트럭을 타고 오름의 꼭대기에 오른다.

깜깜한 밤. 깜깜한 오름 꼭대기에서 깜깜해진 마을과 바다를 본다. 수평선 근처에는 고기잡이 배들이 반짝반짝 빛난다. 다들 오랜만에 작은 일탈.

  • Published: 5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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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드는 면도기 디자인

세상에서 두번째로 멋진 디자인의 (플라스틱)면도기를 보게 되었다.

첫 번째는 미니멀리즘의 극치이면서도 사용성과 디자인을 초록색 고무 하나로 해결한 쉬크 이그젝타 2. 패키지마저 마음에 쏙 든다. 박스로 사서 쓴다.

두 번째는 와이즐리라는 우리나라 스타트업이 만든 면도기. 정기배송을 컨셉으로 하고 있는데, 일단 단품 패키지를 구매해보았다. 디자인을 참 잘 했다. 날을 하늘로 향하게 해서 눕혀놓을 수 있는 형태라고 한다. 하지만 그것보다 마음에 드는 점은 손잡이 아랫쪽에 쇠를 넣었는지 무게중심이 아랫쪽에 있어서, 손에 쥐었을때 손잡이 부분이 샥 하고 동그랗게 말린 손바닥과 손가락 사이를 이동하여 손에 감긴다. 무게감도 꽤 있어서 안정적인 면도가 가능할 듯. 손잡이와 면도날 사이의 목(?) 부분도 길고 굵게 생겨서 안정적인 면도를 할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진다. 디자인을 참 잘 했다.

맨인블랙에 나오는 외계인들에게나 어울릴듯한 괴상한 곡선과 볼륨의 면도기 디자인 일색인 세상에, 멋진 디자인을 보게 되어 정말 좋다. 내일 아침 써봐야겠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나에게는 이그젝타2가 한박스 있기 때문에, 정기배송 주문은 못할 것 같다.

라고 하면 너무 미안하기 때문에, 내일 아침에 써보고 결정해야겠다!

  • Published: 7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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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의 꼴 – 사카이 나오키

디자인의 꼴. 책을 읽었다.
물리적인 제품은 그 기능을 하기 위한 구조, 사람이 제품을 사용하기 위한 인터페이스의 형태, 시대에 따라 구현 가능한 기술적 구조와 마감 등을 토대로 기존의 디자인에서 점점 더 발전적인 형태(혹은 시대상을 반영하는)로 가는 경우가 많아 보인다. 제약사항도 비교적 명확해서 디자이너가 제약의 테두리 안에서 더 다양하게 시도해볼 수 있는 것 같다. 물론 제약을 깰 수도 있을 것이고, 실제로는 여러 이유로 다양하고 자유롭게 시도 못하는 경우가 많겠지만…
스크린 속의 제품은 그에 비해 제약이 적거나 불분명하다. 그리고 제약사항들이 눈에 잘 보이지 않다보니 제약사항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는 경우도 생기고, 어떻게 어디까지 자유롭게 디자인을 시도해야하는지 모르는 상태가 생기는 것 같다. 참고할 만한 것이 없으면 더 그런 것 같고. 특히 전달해야할 정보나 혁신적인 새로운 기능 방식이 물리적 제품보다 훨씬 짧은 주기로 나타나다보니, 기존의 잘 익은 방식을 참고하거나 그것의 내면에 쌓인 고민의 흔적들을 이해하며 내 것을 만들어가기는 시간이 빠듯하다. 동일한 기능의 스크린속 제품을 물리적 제품의 형태로 디자인하는 것을 시도해본다면 제약사항을 명확히 규정하는데 도움이 될까?
내가 했던 디자인도, 방문을 달아야 하는데 어쩌면 어린 아이가 지나갈 수 있는 만큼만 열리는 방문을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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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 독후감을 쓸까 하고 키보드에 손을 올렸는데 딴길로..
– 생각해보니 실제로 고민했던 것은, 디자인 단계가 아닌 디자인 준비 단계인 것 같기도 하다.

  • Published: 7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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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먹고 집에와서 씻고 바로 잠이 들어버렸다. 그리고 3시간만에 깼다.
오랜만에 꿈을 꾸었는데, 내가 도심 속 높은 건물의 옥탑방에 살고 있었다. 펜트하우스가 아니라 옥탑방. 밖이 훤히 보이는 옥탑방이었고, 음악을 들으며 풍경을 감상해야지 하며 블루투스 스피커를 페어링 하는데 계속 페어링에 실패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게 내 집이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며 잠이 깼다. 음악 감상도, 외계인 침공도, 친구들의 방문도. 이야기는 시작되지도 않고 잠이 깨버렸다.

  • Published: 8 months a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