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고 감성적인 디자이너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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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길 풍경

치마를 나풀거리며 한 여자가 자전거를 타고 앞을 지나간다.
페달에 힘을 주어 힘겹게.
손목도 힘이 부친지, 갸우뚱거리며 일자로 이어진 자전거길을 헤쳐간다.
잔잔한 풍경 속에서 힘을 주어 헤쳐간다.

귓가에는 아까부터 Lover, please stay가 들려온다.

  • Published: 2 week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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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루아 밀크

요즘엔 퇴근하고 집에와서 밥을 먹고 씻으면 너무 졸리고 피곤하다. 씻고 밥을 먹으면 더 졸려서 일단 먹고 씻기로 했다. 하지만 그래도 졸리긴 마찬가지다. 가끔 자전거를 타고 나가면 나에게는 조용하고 멍했던 밤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활기찬 저녁과 같다는걸 느낀다. 하지만 장마가 시작되고 나서는 그마저도 못한다. 그런데 오늘 잠이 오지 않는 방법을 발견했다. 밥을 먹고 씻고 깔루아 밀크를 한잔 하면 잠이 싹 가신다. 그래서 오늘은 밥먹을 때부터 영화를 보기 시작해서, 깔루아 밀크를 홀짝거리며 영화를 보다가, 새로 프린트한 물건에 가죽을 대고 바느질을 하며 영화를 다 보았다.

그런데 또 생각이 나서, 깔루아 밀크를 한잔 더 만들어서 홀짝홀짝 마시며 음악을 듣는다. 라디오를 듣다가 알게 된 Nothing But Thieves의 Nothing But Thieves의 앨범을 계속 듣는다. 새로 이사한 집, 맥에 연결된 스피커와 Apple Home으로 연동되어있는 스피커 두 대가 0.2초 정도의 delay를 가지고 서로 노래를 부른다. 기술의 부족함이겠지만, 꼭 콘서트장에서 듣는 느낌이다. 깔루아 밀크를 홀짝홀짝 마시며, 오랜만에 말짱한 밤을 보낸다.

  • Published: 2 week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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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스트 하우스

조용한 해변가 마을, 창가에서 주황 불빛이 새어나오는 네모네모난 이층 집. 홀로 찾아온 여행객들이 하나 둘 모인다. 어색한 듯 어색하지 않은 듯,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태어나 처음 만나 한 식탁에 모여앉는다. 시작은 도란도란 함께 마실 맥주를 살 돈을 마련하기 위한 게임. 아, 조금 늦은 여행객이 도착했다. 내가 주인인 것 마냥 문을 열어준다.

맥주를 홀짝홀짝 마시며, 다녀온 여행지를 이야기하고, 내일 아침 갈 곳을 이야기하고, 버스를 탈 곳을 이야기한다. 첼로를 연주하는 사람, 해외영업을 하는 사람, 법무팀에 있는 사람,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 임상심리학을 연구하는 사람… 몇 안되는데 참 다양한 사람들. 서로의 이야기를 유심히 듣는 사람들. 이야기를 나누며 깊어가는 밤.

깊어가는 밤. 갑자기 다들 트럭에 몸을 싣고 깜깜한 마을 골목을 지나 외곽으로 향한다. 음악을 크게 켜고 몸은 트럭의 움직임에 맞춰 기우뚱 기우뚱. 입구를 막아 놓은 의자를 잠시 옆으로 옮기고, 다시 트럭을 타고 오름의 꼭대기에 오른다.

깜깜한 밤. 깜깜한 오름 꼭대기에서 깜깜해진 마을과 바다를 본다. 수평선 근처에는 고기잡이 배들이 반짝반짝 빛난다. 다들 오랜만에 작은 일탈.

  • Published: 3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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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드는 면도기 디자인

세상에서 두번째로 멋진 디자인의 (플라스틱)면도기를 보게 되었다.

첫 번째는 미니멀리즘의 극치이면서도 사용성과 디자인을 초록색 고무 하나로 해결한 쉬크 이그젝타 2. 패키지마저 마음에 쏙 든다. 박스로 사서 쓴다.

두 번째는 와이즐리라는 우리나라 스타트업이 만든 면도기. 정기배송을 컨셉으로 하고 있는데, 일단 단품 패키지를 구매해보았다. 디자인을 참 잘 했다. 날을 하늘로 향하게 해서 눕혀놓을 수 있는 형태라고 한다. 하지만 그것보다 마음에 드는 점은 손잡이 아랫쪽에 쇠를 넣었는지 무게중심이 아랫쪽에 있어서, 손에 쥐었을때 손잡이 부분이 샥 하고 동그랗게 말린 손바닥과 손가락 사이를 이동하여 손에 감긴다. 무게감도 꽤 있어서 안정적인 면도가 가능할 듯. 손잡이와 면도날 사이의 목(?) 부분도 길고 굵게 생겨서 안정적인 면도를 할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진다. 디자인을 참 잘 했다.

맨인블랙에 나오는 외계인들에게나 어울릴듯한 괴상한 곡선과 볼륨의 면도기 디자인 일색인 세상에, 멋진 디자인을 보게 되어 정말 좋다. 내일 아침 써봐야겠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나에게는 이그젝타2가 한박스 있기 때문에, 정기배송 주문은 못할 것 같다.

라고 하면 너무 미안하기 때문에, 내일 아침에 써보고 결정해야겠다!

  • Published: 4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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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의 꼴 – 사카이 나오키

디자인의 꼴. 책을 읽었다.
물리적인 제품은 그 기능을 하기 위한 구조, 사람이 제품을 사용하기 위한 인터페이스의 형태, 시대에 따라 구현 가능한 기술적 구조와 마감 등을 토대로 기존의 디자인에서 점점 더 발전적인 형태(혹은 시대상을 반영하는)로 가는 경우가 많아 보인다. 제약사항도 비교적 명확해서 디자이너가 제약의 테두리 안에서 더 다양하게 시도해볼 수 있는 것 같다. 물론 제약을 깰 수도 있을 것이고, 실제로는 여러 이유로 다양하고 자유롭게 시도 못하는 경우가 많겠지만…
스크린 속의 제품은 그에 비해 제약이 적거나 불분명하다. 그리고 제약사항들이 눈에 잘 보이지 않다보니 제약사항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는 경우도 생기고, 어떻게 어디까지 자유롭게 디자인을 시도해야하는지 모르는 상태가 생기는 것 같다. 참고할 만한 것이 없으면 더 그런 것 같고. 특히 전달해야할 정보나 혁신적인 새로운 기능 방식이 물리적 제품보다 훨씬 짧은 주기로 나타나다보니, 기존의 잘 익은 방식을 참고하거나 그것의 내면에 쌓인 고민의 흔적들을 이해하며 내 것을 만들어가기는 시간이 빠듯하다. 동일한 기능의 스크린속 제품을 물리적 제품의 형태로 디자인하는 것을 시도해본다면 제약사항을 명확히 규정하는데 도움이 될까?
내가 했던 디자인도, 방문을 달아야 하는데 어쩌면 어린 아이가 지나갈 수 있는 만큼만 열리는 방문을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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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 독후감을 쓸까 하고 키보드에 손을 올렸는데 딴길로..
– 생각해보니 실제로 고민했던 것은, 디자인 단계가 아닌 디자인 준비 단계인 것 같기도 하다.

  • Published: 5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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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먹고 집에와서 씻고 바로 잠이 들어버렸다. 그리고 3시간만에 깼다.
오랜만에 꿈을 꾸었는데, 내가 도심 속 높은 건물의 옥탑방에 살고 있었다. 펜트하우스가 아니라 옥탑방. 밖이 훤히 보이는 옥탑방이었고, 음악을 들으며 풍경을 감상해야지 하며 블루투스 스피커를 페어링 하는데 계속 페어링에 실패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게 내 집이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며 잠이 깼다. 음악 감상도, 외계인 침공도, 친구들의 방문도. 이야기는 시작되지도 않고 잠이 깨버렸다.

  • Published: 5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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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공원에서의 휴식시간

출근을 하고 가방을 내려놓고 노트북을 열고, 곧바로 컵을 들고 커피믹스를 넣고 물을 따른다. 그리고 옥상공원으로 향한다.

나무벽 위에 컵을 내려놓고 담배불을 붙인다. 언뜻 생각하면 쓸데없는 조형미로 나무판재를 사용해 공간을 구성한 듯 싶지만, 몇 미터로 길고 폭이 30센티미터 정도이고 높이는 120센티미터 남짓한 이 나무벽은 어포던스의 극치다. 팔꿈치를 대고 기대어 풍경을 감상할 수도 있고, 풀쩍 뛰어올라 앉아 있을 수도 있고, 심지어 컵을 내려놓기에도 딱이다. 답답하면 그 위에 서서 더 넓은 풍경을 볼 수도 있다.

담배를 피우며 풍경을 보면, 저 멀리 아침 햇빛이 반사되어 주황빛 유리궁전처럼 반짝반짝거리는 건물들이 보인다.
담배를 피우며 풍경을 보면, 파란 하늘에 떠 있는 솜사탕같은 구름들이 보인다.
담배를 피우며 풍경을 보면, 눈발로 가득한 건물 숲이 보인다.
담배를 피우며 풍경을 보면, 윌리엄 터너의 풍경화처럼 몽환적인 노을이 보인다.

가끔, 누군가 같이 올라오거나 담배를 펴다가 만나면, 벤치에 기대어 앉아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눈다. 요즘 세상에서는 어떤 빛을 좇아 이렇게 다들 힘들게 살까. 매일 멋진 풍경을 보고 하루 먹고 살 수 있다면, 지금처럼 먼 곳을 바라보며 하루하루를 지내지는 않을 것 같은데… 하지만 옛날에도 하루하루 바삐 살았다더라, 그리고 그 때도 여유시간이 생기기라도 하면 그 시간을 어찌할 바 몰랐다더라… 따위의 이야기 말이다.

  • Published: 5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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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이야기

이것 조차 옛날 이야기이지만, 친구에게 옛날에 내가 보냈던 편지의 내용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참으로 생소했다.

나에게는 남아있지 않은 나의 생각과 글이, 누군가는 기억하고 가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을 하면 신기하다.

하지만 특별히 군대에 있을 때에는 가끔 편지지에 글을 쓰기 전, 노트에 먼저 편지를 썼었다. 그래서 ‘내가 예전에 누군가에게 썼던 편지의 내용’이 약간 남아있다. 부끄럽기도 하지만 재밌기도 하다.

이메일의 시대로 넘어오며, 내가 보낸 편지는 이제 나의 편지함에도 남게 되었다. 보내고 난 뒤에 일부러 찾으려고 하지않으면 눈에 띄지는 않지만, 답장을 받게 되면 바로 아래 나의 편지가 보인다.

이제 나의 이메일함은 일간신문함이나 고지서통지함 비슷하게 바뀌어버렸는데, 오랜만에 사람들과 주고받은 이메일들(1년에 한두번 있을까 말까 한)을 보게 되었다.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았구나, 예전엔 왜 그랬지, 예전엔 이랬었는데 지금은 왜 이렇지, 왜 이런 생각을 안하고 살지.

예전의 편지보다는 밋밋해졌지만, 그래도 내가 누군가에게 보낸 편지에 쓴 이야기와 답장들을 다시 볼 수 있는 점은 이메일이 좋다. 그 때의 나, 그 이전의 나, 모두 다른 내가 누군가와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들춰보면 재미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어떤가도 생각해보게 된다. 마치 생각과 감정의 사진 같다.

물론 그런 사진 한 장이 생기는 것은, 가뭄에 콩 나듯. 일년에 한두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다.

  • Published: 6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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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젠가 만난다 – 채사장

지대넓얕을 열심히 들으며, 나와 비슷한 연배인 사람들인데도 지식도 많고 생각도 깊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대화를 듣고 있는 것이 참 좋다는 생각도 했다. 사람들도 잘 만나지 않고, 특히 강연이나 세미나 혹은 모임 같은 것을 적극적으로 가봐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던 나인데, 이 사람들의 강연은 듣고 싶어졌다.

작년 11월에는 독실이의 강연을 들었고, 12월에는 채새장의 북토크를 들었다. 북토크,북콘서트는 뭐지… 라고 생소한 영어를 보며 강연일까? 했는데, 한글로 하면 ‘책 출간 기념 강연’ 정도가 되겠다. 사실 채사장의 책을 읽어본 적은 없었고, 이번에 책을 출간했는지도 몰랐다. 나는 채사장을 직접 만나 채사장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을 뿐이었다. 북토크는 책 예약구매자에 한해 추첨을 통해 초대장을 준다고 하여 나는 책을 예약구매 했다.

채사장의 북토크는 자신이 쓰고있는 책들의 전체적인 관계, 그리고 이번에 출간한 책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관계. 나와 타인, 나와 세계, 나와 죽음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와는 정말 거리가 멀었던 단어, 관계.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관계’의 정의보다 훨씬 더 넓은 범위를 생각하는 채사장의 정의가 좋았다. 책에서 마음에 들었던 부분들을 아래 적는다.

세계와 자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원인과 결과, 선과 후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근원인 동시에 결과가 된다.

세계에 대한 두 가지 견해가 있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세계가 자아와는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반면 다른 이들은 세계가 자아와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주관에 의해 해석된 무엇이라고 본다. 일반적으로는 첫 번째 부류의 사람을 ‘실재론자’로, 두 번째 부류의 사람을 ‘관념론자’로 이름 붙여서 구분짓는다. 하지만 내가 궁금한 것은 이러한 용어로의 분류가 아니라 당신의 생각이다. 당신은 어떤 관점이 타당하다고 생각하는가? 지금까지 어떤 세계관을 당연하다고 믿으며 살아왔는가?
p.32

 

‘세계’는 언제나 ‘자아의 세계’다. 객관적이고 독립된 세계는 나에게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 나는 내가 해석한 세계에 갇혀 산다. 이러한 자아의 주관적 세계, 이 세계의 이름이 ‘지평,horizon’이다. 지평은 보통 수평선이나 지평선을 말하지만, 서양철학에서는 이러한 의미를 조금 더 확장해 자아의 세계가 갖는 범위로 사용한다.
즉, 지평은 나의 범위인 동시에 세계의 범위다. 우리는 각자의 지평에서 산다.
그러므로 만남이란 놀라운 사건이다. 너와 나의 만남은 단순히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넘어선다. 그것은 차라리 세계와 세계의 충돌에 가깝다. 너를 안는다는 것은 나의 둥근 원 안으로 너의 원이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감내하는 것이며, 너의 세계의 파도가 내 세계의 해안을 잠식하는 것을 견뎌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일 거다. 폭풍 같은 시간을 함께ㅔ하고 결국은 다시 혼자가 된 사람의 눈동자가 더 깊어진 까닭은. 이제 그의 세계는 휩쓸고 지나간 다른 세계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더 풍요로워지며, 그렇기에 더욱 아름다워진다.
헤어짐이 반드시 안타까운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실패도, 낭비도 아니다. 시간이 흘러 마음의 파도가 가라앉았을 때, 내 세계의 해안을 따라 한번 걸어보라. 그곳에는 그의 세계가 남겨놓은 시간과 이야기와 성숙과 이해가 조개껍질이 되어 모래사장을 보석처럼 빛나게 하고 있을 테니.
p.33-34

 

하지만 상식적인 시간관은 ‘나’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나 이외의 모든 것, 즉 사물, 동물, 타인은 원인과 결과라는 시간의 법칙에 얽매여 있지만, 나 자신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나의 시간은 중첩되고 역행하며 드러난다. 실제로 그렇지 않은가? 나에게는 미래가 현재의 원인이기도 하고 과거가 현재의 결과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보자. 여기 미래의 성공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의 내면에서 원인이 되는 시간은 무엇인가? 그것은 미래다. 미래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현재는 미래의 결과물이 되는 것이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자아의 내면세계에서 시간은 우리의 상식처럼 하나의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겉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사람은 자기만의 시간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어떤 이는 현재에 살지만 다른 이는 과거에 살고, 또 다른 이는 미래에 산다.
p.98-99

 

우리는 세계를 점검해봐야 한다. 나의 세계 안에는 무엇이 있고, 밖에는 무엇이 있는지. 혹시 나는 고집스레 단일한 진리관을 움켜쥐고 빈곤하게도 이것만으로 평생을 살아가려고 작정했던 것은 아닌지를. 또한 외부의 내가 모르는 많은 것을 단순히 비진리라 규정해버림으로써 그것을 안 봐도 괜찮은 것들이라고 스스로 위안했던 것은 아닌지를. 당신이 진정으로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이라면 점검해봐야 한다.
당신과 나 그리고 우리의 세계가 흑과 백으로 칠해진 것이 아니라, 다채로운 색깔로 빛나게 되기를 기대한다.
p.156-157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는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질문하거나, 질문의 한계를 인식하지 못한 채 질문한다. 나는 특히 인류가 오랜 시간 고민해왔던 중요한 질문일수록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렇지 않은가? 의심이 오래될수록 의심이 실제처럼 느껴지듯, 질문이 오래될수록 질문은 그럴듯하게 느껴지는 법이다.
p.230

  • Published: 6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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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아홉 생일, 1년 후 죽기로 결심했다 – 하야마 아마리

쉬는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라는 생각으로 지내고 있지만, 사실 마음 한켠에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눠야지’, ‘책을 많이 읽어야지’, ‘영화를 많이 봐야지’, ‘무언가 만들어야지’라는 희망사항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그 중 하나, 책을 읽겠다고 한 것 중 목록에 있던 한 책을 읽었다. 동료가 최근에 인상깊게 읽었다고 했던 ‘스물아홉 생일, 1년 후 죽기로 결심했다’. 약 두시간 만에 다 읽을 정도로 재미있었고, 쉽게 읽히는 책이었다.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구매를 했는데, 분류가 소설이 아닌 에세이로 되어있었다. 소설인줄 알고 있었는데… 하고 보니, 필명을 따로 쓰는 작가의 실제의 이야기를 에세이 형식으로 풀어낸 책이었다.

초반 부에서, 작가는 자신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는 스물아홉이다.
나는 뚱뚱하고 못생겼다.
나는 혼자다.
나는 취미도, 특기도 없다.
나는 매일 벌벌 떨면서 간신히 입에 풀칠할 만큼만 벌고 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내가 이렇게도 형편없는 인간이었나?
처음엔 물이 뜨겁지 않았다. 그래서 괜찮은 줄 알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내가 끓는 물에 들어온 개구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현재의 삶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진 것이다.

 

이야기는 대략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작가는 자신을 어렸을 때부터 ‘하고싶은 게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외모도 보잘 것 없는 여성, 하루하루 먹고사는데에도 힘겨운 인생이라고 생각하며 지냈다. 그러던 자신의 29살 생일 날, 자살을 하려고 생각하다가 포기하고 있는 와중에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화려한 라스베이거스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어차피 죽을 거라면 단 한번이라도 저 꿈같은 세상에서 손톱만큼의 미련도 남김없이 남은 생을 호화롭게 살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작가는 1년동안 열심히 돈을 모아서 며칠만이라도 라스베이거스에서 호화롭게 살고, 서른이 되는 다음 생일 날 목숨을 끊기로 한다.
이렇게 마음먹은 뒤부터 작가는 낮에는 일반 회사의 파견직원, 밤에는 긴자에서 호스티스 생활을 하고, 주말에는 누드 모델을 하게 된다. 그렇게 1년을 지내며 예전엔 없었던 진정한 친구들을 사귀게 되고, 다양한 꿈을 꾸며 열심히 살아가는 호스티스 친구들과 동창 친구의 모습을 보기도 하고, 상류사회의 체험이나 여러 연륜있는 사람들을 만나며 다양한 경험과 다양한 인생을 보게 된다.
그렇게 1년을 보낸 뒤, 작가는 라스베이거스로 떠나 며칠간의 호화로운 생활과 도박을 하고, 서른이 된 날 아침, 결국 자신이 가져온 돈 보다 5달러를 더 땄다는 것을 알게 된다. 원래는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하려고 했지만, 작가는 그 5달러를 보며 다시 마음을 다잡고 일어나 결국은 성공한 커리어 우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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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야기는 좀 뻔할 수 있지만 책은 전체적으로 재미있고 의미있게 생각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실제의 일이었다는 것과, 의미있는 하나하나의 이야기들을 풀어내며 직접적으로 ‘여기가 새겨들어야 할 곳이야’를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선문답 같은 자기계발서나 이야기를 흥미있게 풀어내는 소설이 아닌 그 중간지점의 느낌이었다. 어찌보면 술을 마시며 옆에 있는 누군가 자신의 경험에 대해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 주듯이. 그리고 작가는 그것이 ‘어때, 대단하지?’ 라고 들려주기 보다는, ‘나는 이때 이렇게 느꼈어’ 라고 이야기하는 듯 하다. 응원의 마음이 조금 들기도 하고, 소설같은 흥미로움, 짜릿함도 느껴졌다.
그리고 책에서 가장 중요하게 이야기하려는 것들도 ‘목표에 도달하고 나서’ 보다는 목표에 도달하기까지의 여러가지 경험들과 생각들, 깨우치게 된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 책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목표지점’을 설정하고 나서 삶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목표가 없는 삶에서 자신이 나약했었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개개인의 삶에서 실제로 이런 경험을 하기는 쉽지 않다. 술을 마시며 옆사람이 들려주었다면 ‘진짜? 대단한 사람이네’라고 생각할 정도로 정작 나는 쉽게 마음먹기 힘들다. 1년동안의 작가의 삶도 언뜻 생각해보면 힘들긴 했지만 호스티스라는 생활을 무사히 잘 거쳐간 것이 신기할 정도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대단한 사람’이 될 수는 정말 없을까? 라고 생각을 해보게 된다. 초반부에 나왔던, 끓는 물에 들어온 개구리의 이야기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끊임없이 인용되는 이유는, 인간의 삶에 그런 부분들이 많아서가 아닐까. 그와 같은 맥락에서, 소설에 나온 인도 요리사 친구가 했던 말이 마음에 들었다. 머릿속에서 먼지에 덮여있던 종이에 바람을 훅 불어준 것처럼.

“평생의 꿈을 가로막는 건 시련이 아니라 안정인 것 같아. 현재의 안정적인 생활을 추가하다 보면 결국 그저 그런 삶으로 끝나겠지.”

  • Published: 8 months a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