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 무라카미 하루키

한여름 밤 집중하지 못한 채 읽기 시작하여, 단풍이 붉게 물든 가을에 와서야 소설을 다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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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읽고 난 뒤의 색채가 없는 서울 하늘.
오늘 소설은 끝에 한 다섯 장 쯤 찢겨진 이야기처럼, 홍콩영화처럼, 미적지근하게 끝났다.

의도치 않게 책의 제목처럼 나도 순례를 하듯 이곳 저곳에서 읽었다. 대부분의 책을 집에서나, 전철에서나, 학교에서 읽던 내가 그 평범한 장소를 두고 밴드 합주실, 한강 공원, 회사에서 느긋이 읽었다. 생각보다는 이야기가 정적이어서 쉽게 흥미를 가지지 못했지만 한 30분 정도 읽기 시작하면 빠져나올 줄 모르게 읽고 있었다. 아무래도 잘 외워지지 않는 제목을 가진 소설.

생각해보면 내가 읽고 재미있어 하는 소설은 스토리가 흥미진진하거나(아멜리 노통브나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그렇다) 표현이나 묘사가 멋지거나(요시모토 바나나가 그렇다)인 것 같은데,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그런 종류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표현하자면, 일상에서 일어날만하면서도 조금 기묘한 이야기에 내가 주인공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한다. 이 소설은 다른 무라카미하루키의 소설에 비해 이야기의 전개는 잔잔하면서도, 그 전개 속의 소소한 대화는 현실에 대비해 곱씹어보게 된다. 나는 어땠나, 그리고 나도 지금 그렇게 느끼나, 와 같은.

고등학교 때 친했던 혼성의 그룹이 있었다고. 어쩌면 일부분 공감을 느낄만 한 부분이었다. 하지만 소설처럼 큰 사건은 없었다. 그냥 좋고, 아련한 느낌이 드는 추억이 되었다. 그런 느낌을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게 한 부분이 있었다. 난 소설에서 이런, 나에게 의미있는 표현이나 묘사가 좋다.

 

“혹시 기회가 있으면 아오랑 아카에게 전해 줘. 나, 여기서 잘 산다고.”

“전해 줄게.”

“저기, 가끔 그 둘하고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아. 아니면 셋이서 같이. 너를 위해서도 그 애들을 위해서도, 그게 좋을 거라고 생각해.”

“그래. 그게 좋을지도 모르겠네.”

“그리고, 어쩌면 나를 위해서도.” 에리는 말했다. “물론 난 함께할 수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쓰쿠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좀 안정되면 꼭 그런 기회를 만들어 볼게. 너를 위해서도.”

“그렇지만 참 이상해.” 에리가 말했다.

“뭐가?”

“그렇게 멋진 시대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게. 온갖 아름다운 가능성이 시간의 흐름 속에 잠겨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

쓰쿠루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야기의 절정이면서도 정신이 멍한, 잠이 덜 깬 상태 딱 그만큼의 느낌으로 다가온 몽롱한 대화.

 

쓰쿠루는 수화기를 들고 사라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시곗바늘은 4시 조금 전을 가리켰다. 신호음이 열두 번 울리고, 그리고 사라가 받았다.
“이런 시간에 정말 미안해. 그래도 꼭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이런 시간이라니, 도데체 어떤 시간?”

“새벽 4시가 좀 안 됐어.”

“참, 이런 시간이 실제로 있는 줄도 몰랐네.” 사라가 말했다. 목소리로 보아 아직 의식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 누가 죽었어?”

“아무도 안 죽었어.” 쓰쿠루는 말했다. “아직 아무도 안 죽었어. 그렇지만 반드시 오늘 밤 안에 당신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어떤 건데?”

“당신을 정말 좋아하고, 진심으로 당신을 원해.”

전화 저편에서 뭔가를 찾는 듯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 다음 그녀는 작게 기침을 하고 한숨 같은 소리를 흘렸다.

“지금 이야기해도 돼?” 쓰쿠루가 물었다.

“당신을 정말 좋아하고, 진심으로 당신을 원해.” 쓰쿠루는 그 말을 반복했다.

“그게 새벽 4시에 나한테 전화해서 전하고 싶은 말인거네?”

“응.”

“술 마셨어?”

“아니, 맨 정신이야.”

“그렇구나, 이공계 사람치고는 아주 열정적이네.”

“역을 만드는 것과 같으니까.”

“어떻게 같은데?”

“간단해. 역이 없으면 전차가 거기 멈출 수 없어. 내가 해야 할 일은 먼저 그 역을 머릿속에 그리고 구체적인 색과 형태를 주어 가는 거야. 그게 처음 할 일이야. 뭔가 부족한 것이 있으면 나중에 고치면 돼. 그리고 나는 그런 작업에 익숙해.”

“당신은 훌륭한 엔지니어니까.”

“그러고 싶어.”

“그리고 당신은 날이 샐 때까지 나를 위해 쉬지도 않고 열심히 특별한 역을 만들고 있는 거고?”

“그럼. 당신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원하니까.”

“나도 당신이 정말 좋아. 만날 때마다 조금씩 더 마음이 끌려.” 사라는 말했다. 그리고 문장에 여백을 두는 것처럼 잠깐 틈을 두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새벽 4시고 새도 아직 눈을 뜨지 않았어. 내 머리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태고. 그러니까 앞으로 사흘만 기다려줄래?”

“좋아. 하지만 사흘밖에 못 기다려. 아마 그게 한계일 거야. 그래서 이런 시간에 당신한테 전화를 건 거야.”

“사흘이면 충분해, 쓰쿠루 씨. 공사 기일은 반드시 지킬게. 수요일 저녁에 만나.”

“깨워서 미안해.”

“괜찮아. 새벽 4시에도 시간이 제대로 흐른다는 걸 알았어. 바깥은, 벌써 밝아?”

“아직이야. 곧 밝아질 거야. 새들도 울기 시작할 테고.”

“빨리 일어나는 새는 벌레를 많이 잡을 수 있어.”

“이론적으로는.”

“그렇지만 아마 거기까지는 확인할 수 없을 거야.”

“잘 자.” 그가 말했다.

“저기, 쓰쿠루.”

“응.”

“잘 자. 마음 놓고 푹 자.”

그리고 전화가 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