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고 감성적인 디자이너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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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수필

꽃송이 같은 첫눈 – 강경애

오늘은 아침부터 해가 안 나는지 마치 촛불을 켜대는 것처럼 발갛게 피어오르던 우리 방 앞문이 종일 컴컴했다. 그리고 이따금식 문풍지가 우룽룽 우룽룽 했다. 잔기침 소리가 나며 마을 갔던 어머니가 들어오신다.

“어머니, 어디 갔댔어?”
바느질하던 손을 멈추고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치마폭에 풍겨 들어온 산뜻한 찬 공기며 발개진 코끝.
“에이, 춥다.”
어머니는 화로를 마주앉으며 부저로 손끝이 발개지도록 불을 헤치신다.
“잔칫집에 갔댔다.”
“응. 잔치 잘해?”
“잘하더구나.”
“색시 고와?”
“쓸 만하더라.”
무심히 나는 어머님의 머리를 쳐다보니 물방울이 방울방울 서렸다.
“비 와요?”
“비는 왜, 눈이 오는데.”
“눈? 벌써 눈이 와. 어디.”
어린애처럼 뛰어 일어나자 손끝이 따끔해서 굽어보니 바늘이 반짝 빛났다.
“에그,, 아파라, 고놈의 바늘.”

나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옥양목 오라기로 손끝을 동이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하늘은 보이지 않고 눈송이로 뽀하다. 그리고 새로 한 수숫대 바자갈피에는 눈이 한 줌이나 두 줌이나 되어 보이도록 쌓인다. 보슬보슬 눈이 내린다. 마치 내 가슴속가지도 눈이 내리는 듯했다. 그리고 나는 듯 마는 듯한 냄새가 나의 코끝을 깨끗하게 한다. 무심히 나는 손끝을 굽어보았다. 하얀 옥양목 위에 발갛게 피가 배었다.
‘너는 언제까지나 바늘과만 싸우려느냐?’
이런 질문이 나도 모르게 내 입속에서 굴러 떨어졌다. 나는 싸늘한 대문에 몸을 기대고 어디를 특별히 바라보는 것도 없이 언제까지나 움직이지 않았다. 꽃송이 같은 눈은 떨어진다, 떨어진다.

『신동아』, 1932. 12

가장 시원한 이야기. 정지용

그날 밤 더위란 난생처음 당하는 것이었다. 새로 한 시가 지나면 웬만할까 한 것이 웬걸 두 시 세 시가 되어도 한결같이 찌는 것이었다. 설령 바람 한 점이 있기로서니 무엇에 쓸까만 끝끝내 바람 한 점이 없었다. 신을 끌고 나가서 뜰 앞에 선 나무 밑으로 갔다. 잎알 하나 옴칫 아니 하는 것이었다. 옴칫거리나 아니하나 볼까 하고 갸웃거려 보았다. 죽은 고기 새끼 떼처럼 차라리 떠 있는 것이었다. 나무도 더워서 죽은 것이었던가? 숨도 막혔거니와 기가 막혀서 가지를 흔들어 보았다. 흔들리기는 흔들리는 것이었다. 마음이 적이 놓이는 것이었다. 참고 살기로 했다. 아무리 덥다 해도 제철이 오고 보면 이 나무에 새로운 바람이 깃들 것이겠기에!

『정지용전집』, 민음사, 1988에서 재수록.

  • Published: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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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름을 지어다 며칠은 먹었다. 박준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이상한 뜻이 없는 나의 생계는 간결할 수 있다 오늘 저녁부터 바람이 차가워진다거나 내일은 비가 올 거라 말해주는 사람들을 새로 사귀어야 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이의 자서전을 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익숙한 문장들이 손목을 잡고 내 일기로 데려가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찬비는 자란 물이끼를 더 자라게 하고 얻어 입은 외투의 색을 흰 속옷에 묻히기도 했다’라고 그 사람의 자서전에 쓰고 나서 ‘아픈 내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는 문장을 내 일기장에 이어 적었다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워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_
좋더라.

미신

올해는 삼재였다

밥을 먹을 때마다
혀를 깨물었다

나는 학생도 그만하고
어려지는, 어려지는 애인을 만나
잔디밭에서 신을 벗고 놀았다

두 다리를 뻗어
발과 발을 맞대본 사이는

서로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는 말을
어린 애인에게 들었다

나는 빈 가위질을 하면
운이 안 좋다 하거나

새 가구를 들여놓을 때도
뒤편에 왕자를 적어놓아야
한다는 것들을 말해주었다

클로버를 찾는
애인의 작은 손이
바빠지고 있었다

나는 애인의 손바닥,
애정선 어딘가 걸쳐있는
희끄무레한 잔금처럼 누워

아직 뜨지 않는 칠월 하늘의
점성술 같은 것들을
생각해보고 있었다.

_
스무살, 멋모르고 밥을 얻어먹다가
시 동아리에 들어갔다.

누군가의 몇년 전
누군가의 십수년 전
누군가의 몇십년 전.

3월에는 매일 밥을 얻어먹고, 금요일에는 시평회를 하고(술을 마시고), 가을에는 시화전을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시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이런 시는 마음에 닿는다. 아마 그때는 이해하기 어려운 시를 찾아다녔던 것 같다.

그래도 아직 이런 시를 읽고 마음이 울리는 것을 보니, 기계가 되지는 않았나보다. 요즘의 걱정이다.

  • Published: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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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의 심리학 – 로버트 치알디니

설득의 심리학 – 로버트 치알디니

  • 상호성의 법칙
  • 일관성의 법칙
  • 사회적 증거의 법칙
  • 호감의 법칙
  • 권위의 법칙
  • 희귀성의 법칙

오랫동안 읽었던 책을 드디어 다 읽었다. 사실 나랑은 잘 안맞는 책이다 싶어서 중간에 중단할까 생각도 했는데, 이미 시작한 거 끝까지 읽자는 마음으로 읽었다. 몇 년 뒤 다시 읽으면 다를까? 마음에 들었던 부분을 따로 기록해두지 않아서 남은 것은 없지만, 다 읽고나니 책의 목차가 그대로 이 책의 이야기이며 기억해두어야 할 지식었다. 따라서, 목차를 남겨둔다.

이 책은 사람들을 설득시키는 법칙에 대한 설명과 다양한 사례를 들고 있는데, 지은이가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은 이 법칙을 악용하여 불로소득을 취하려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누군가 나도 모르게 나를 끌게 만드는 방식을 취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그것이 악의적인 것인지 합당한 것인지를 판단하도록 일깨워주는 지식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설득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려주는 지식이다.

지은이는 다양한 연구와 사례를 들어 재미있게 설득의 법칙들을 설명하는데(그런데도 왜이리 지루했을까), 이런 형태로 자신의 주장이나 지식을 전달하는 방법은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 한편으로는 다양한 경험과 다양한 이야기들, 역사들을 안다면 이런 ‘법칙’이 아니더라도 개개인이 이미 체화하여 사용하고 있거나, 다른 표현으로 지식화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나는 이런 분야에 대해 전혀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껏 뭐하고 살았나 싶기도 하고, 잘 기억해두고 삶을 사는데 있어서 유용하게 써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디자인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1. 상호성의 법칙

상호성의 비밀

  • 상대방을 빚진 상태로 만들어라
  • 원치 않는 호의에도 빚진 감정은 생겨난다
  •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

상호성의 속임수

상호성을 이용한 일보 후퇴, 이보 전진 전략

  • 워터게이트 사건은 상호성과 대조효과가 낳은 비극
  • 먼저 무리하게 요구하라
  • 책임감과 만족감을 불러일으켜라

상호성의 법칙에 대항하는 자기 방어 전략

  • 호의와 술책을 구분하라
  •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응하라

2. 일관성의 법칙

기계화된 일관성의 함정

  • 한번 선택한 것은 버리기 아깝다
  • 약속은 약속을 낳는다

개입과 일관성의 심리전

작은 약속부터 시작하는 문전 걸치기 기법

미군 조종에 성공한 중공군의 세뇌 프로그램

  • 자발적 개입을 증명할 기록을 남긴다
  • 공식적인 약속은 생명력이 길다

자녀 교육시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

일관성의 근거를 만드는 미끼 기법

  • 승낙이 이루어지면 미끼를 제거한다

일관성의 법칙에 대항하는 자기 방어 전략

  • 본능적인 거부감에 따라 행동한다
  • 처음에 자신이 의도했던 바를 되돌아본다

3. 사회적 증거의 법칙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가짜 웃음을 들려주는 이유

  • 다른 사람의 행동에 의해서 더 쉽게 설득된다

사이비 종교에 빠지는 이유

‘다수의 무지’가 불러온 길거리 살인사건

  • 구경꾼은 결코 도와주지 않는다
  • 오직 한 사람만을 선택하라

유사성의 영향력

  • 불확실성과 유사성이 빚어낸 인민사원의 집단자살

사회적 증거의 법칙에 대항하는 자기 방어전략

  • 조작된 사회적 증거에 대해서는 반격을 가하라
  • 과정상의 오류를 점검하라

4. 호감의 법칙

호감의 법칙을 이용한 판매전략

  • 친구의 부탁은 거절하기 힘들다
  • 자동차 판매왕의 비결

호감의 원천

  • 신체적 매력에 끌린다
  • 사소한 공통점에도 호감을 갖는다
  • 칭찬해주는 사람을 좋아한다

호감의 법칙을 활용한 집단간의 갈등 극복

  • 접촉이론 : 익숙해지면 좋아진다
  • 협동을 통한 학습 : 공동의 목표를 제공한다
  • 상호협력은 호감을 크게 만든다
  • 착한경찰, 나쁜경찰 전략

연상작용의 엇갈리는 명암

  • 만찬 기법 : 좋은 이미지와 연결시켜라
  • 타인의 성공에서도 대리만족을 느낀다

호감의 법칙에 대항하는 자기 방어 전략

5. 권위의 법칙

밀그럼의 실험 : 권위에 대한 맹종

아브라함은 왜 아들을 죽이려 했는가

권위의 상징물들

  • 직함은 권위를 대변해준다
  • 옷차림에 따라 대우가 달라진다
  • 고급자동차에 더 관대하다

권위의 법칙에 대항하는 자기 방어 전략

  • 전문가가 맞는지 살펴본다
  • 전문성과 트릭을 구별하라

6. 희귀성의 법칙

희귀성의 가치

  • 한정판매 : “얼마 없습니다!”
  • 시간제한 : “이제 곧 끝납니다!”

상실에 대한 두려움

  • 제한된 자유에 대한 심리적 저항
  • 세 살바기의 이유있는 반항

로미오와 줄리엣 효과

  • 로미오와 줄리엣이 3일 만에 사랑에 빠진 이유
  • 금지법이 만들어낸 희귀한 세제
  • 금지하면 더 하고 싶다

희귀성의 영향력을 강화시키는 조건

  • 갑작스런 희귀성이 혁명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 희귀성이 경쟁심리를 부추긴다

희귀성의 법칙에 대항하는 자기 방어 전략

  • 흥분하지 말라
  • 득실을 냉정히 따져보라
  • Published: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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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 알베르트 까뮈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소설을 읽었다. 알고 있는 것이라면 아주 유명한 소설이라는 것. 다 읽고 나니 100쪽 정도의 짧은 소설이었고, 그 뒤에 ‘부조리 문학’이라는 짧은 설명이 있었다.

지난 주말과 이번 주말 오후, 인도 구루가온의 아파트의 베란다에서 햇살을 맞으며 읽었는데 괜찮은 선택이었다. 지하철 형광등 아래 서서 읽는 것보단 훨씬 이야기와 어울렸다.

소설을 다 읽을 때까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깊게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저 이야기를 따라가고 글자로 적힌 풍경들을 머릿속에 그리며 읽어갔다. 표현들이 워낙 사실적이어서 그 풍경을 따라 한줄한줄 읽는 것이 흥미진진했다. 마치 영화처럼.

결과적으로 자신의 적극적인 의지 없이 점점 좋지 않은 상태로 빠져들어가는 주인공, 그리고 그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게 옭아매는 법이라는 틀. 연관성이 적어보이는 여러가지 행동과 사건들이 결국 누군가에 의해 하나의 주제로 엮이게 되고 그 사람을 대변하게 된다. 나머지 수많은 일상과 행동과 성격들로 대변할 수 있는 그 사람의 모습은 힘을 잃고 말이다. 결론짓기 어려운 애매모호한 사건이 누군가의 의지에 따라 다른 것들과 엮여져 범죄로 단정지어진다.

마지막에 가서는, 이런 법이라는 것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나? 분명 흑과 백, 이분법으로 무 자르듯 자를 수 없는 이 세상이 어떤 순간엔 옳고 그름, 두 가지로 구분되게 된다. 그렇다면 그릇되었더라도 나는 내 삶을 지켜내겠다. 물론 그렇게 하기는 힘들겠지만.

  • Published: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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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쏘시개 – 아멜리 노통브

“도대체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이지? 지금이 전쟁 중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모든 것을 허용하는 사람과 춥기 때문에 자신에게 모든 것을 허용하는 여자 사이에 있다니!”

  • Published: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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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 줄리언 반스

난 소설을 읽어도 소설의 이야기보다 특정한 부분에 심취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에도 그렇다. 그리고 이번 소설은 E-book을 전자도서관에서 대여해서 읽었는데, 대여기간이 끝나서 책갈피 해놓은 부분이 다 사라져 버렸다. 그 중 건진 것.

한 남자가, 밤이 늦어, 살짝 취한 나머지 전 애인에게 편지를 쓴다고 생각해보자. 그가 편지봉투에 주소를 적고, 우표를 붙인 다음, 코트를 찾아 입고 우체통이 있는 곳까지 걸어가서 편지봉투를 밀어넣은 후, 걸어서 집으로 돌아와 잠을 잔다고 말이다. 그가 마지막 과정까지 일사천리로 행동에 옮길 가능성은 거의 없다. 안 그런가? 편지는 다음 날 아침까지도 부치지 않은 채 놓여 있을 것이다. 얼마 안 가서, 아니나 다를까, 생각이 달라진다. 그런 점에서 이메일에는 미덕이 많다. 임의적이고, 즉각적이고, 감정에 대해, 감정상의 결례에 대해서까지 진실되다. 77.48%

옛날 사람들은 편지가 전달될 때까지의 긴 시간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장담하는데, 삼 주 동안 우체배달부를 기다리는 건 사흘동안 이메일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 사흘이 얼마나 길게 느껴졌느냐고? 어지간한 보상으론 성에 차지 않을 만큼 길었다. 베로니카는 놀랍게도 내 메일의 제목 – 안녕, 또 나야. – 을 지우지 않았는데, 그것이 내겐 사뭇 귀엽게 여겨졌다. 78.91%

  • Published: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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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

…..
그러나 나는 돌아서서 전보의 눈을 피하여 편지를 썼다. ‘갑자기 떠나게 되었습니다. 찾아가서 말로써 오늘 제가 먼저 가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만 대화란 항상 의외의 방향으로 나가버리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렇게 글로 써서 알리는 것입니다.
….
쓰고 나서 나는 그 편지를 읽어봤다. 또 한번 읽어봤다. 그리고 찢어버렸다.
덜컹거리며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서 나는 어디쯤에선가 길가에 세워진 하얀 팻말을 보았다. 거기에는 선명한 검은 글씨로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씌어 있었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1964)

  • Published: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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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의 축제 – 밀란 쿤데라

유명한 소설가인 밀란 쿤데라의 최근 소설. 이동진의 빨간 책방에서 이야기를 듣고 읽어보았다. 빨책에서 말하길, 이전 쿤데라 소설들의 모든 이야기가 한 곳에 들어있는 것 같다고, 그리고 쿤데라의 끝이 암시되어 있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었다. 사실 다른 소설들은 읽어보지 않은 채 이 소설만 읽어서 아쉽긴 하지만, 이 책으로 인해 다른 쿤데라의 소설을 읽어보리라, 그리고 나서 다시 이 소설을 한번 더 읽어보리라 생각하며 이 소설을 읽었다.

재미있는 것은 글쓴이-쿤데라가 소설에 가끔 개입해서 이야기에 등장하는데, 이게 이야기의 중요한 흐름이 된다. 첫 ‘부’의 제목도 재미있다.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나서 주인공들의 짧은 시작이 보여진다. 소설은 ‘부’와 ‘장’으로 구성되는데, 일곱 개의 ‘부’ 안에 여러 장이 들어있는 식이다. 그리고 그 ‘부’와 ‘장’은 그안에 펼쳐질 내용들의 상황에 대한 설명이 직설적으로 담겨있다. 다음 장에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이미 알려주고 시작하는 것이다. 어떤 의도일까? 상황은 상황이고, 그 안에 들어있는 이야기의 의미를 찾아보라는 것일까?

첫 부의 첫 장은 이렇다.

/알랭은
배꼽에 대해
곰곰 생각한다/

6월의 어느 날, 아침 해가 구름에서 나오고 있었고, 알랭은 파리의 거리를 천천히 지나는 중이었다. 아가씨들을 자세히 보니 아주 짧은 티셔츠 차림에 바지는 모두 아슬아슬하게 골반에 걸쳐져서 배꼽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그는 거기서 완전히 홀려버렸다. 홀려 버린 데다 혼란스럽기까지 해서, 아가씨들이 남자를 유혹하는 힘이 이제는 허벅지도 엉덩이도 가슴도 아닌, 몸 한가운데의 둥글고 작은 구멍에 총집중돼 있단 말인가 싶었다.
그렇게 해서 그는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남자가 (또는 어떤 시대가) 여성의 매력의 중심을 허벅지에 둔다면 이러한 성적 성향의 특성을 어떻게 묘사하고 정의할 것인가? 그는 즉석에서 답을 만들어 냈다. 허벅지의 길이는 에로스의 성취로 이어지는 매혹적인 긴 여정 (허벅지가 길어야 하는 게 바로 그레서다.)의 은유적 이미지다. 실제로 성교 중에도 기다란 허벅지는 여자에게 낭만적인 마법을 일으켜 그 여자를 다가가지 못할 존재로 만들지 않는가 하고 알랭은 생각했다.
만약 남자가 (또는 한 시대가) 여성의 매력의 중심을 엉덩이에 둔다면 이러한 성적 성향의 특성을 어떻게 묘사하고 정의할 것인가? 그는 즉석에서 답을 만들어 냈다. 난폭함, 쾌활함, 표적을 향한 최단거리의 길, 두 짝인 만큼 더 흥분시키는 표적.
만약 남자가 (또는 한 시대가) 여성의 매력의 주임을 가슴에 둔다면 이러한 성적 성향의 특성을 어떻게 묘사하고 정의할 것인가? 그는 즉석에서 답을 만들어 냈다. 여자의 신성화, 예수에게 젖을 먹이는 동정녀 마리아, 여성의 고귀한 사명 앞에 무릎 꿇은 남성.
하지만 몸 한가운데, 배꼽에 여성의 매력이 집중되어 있다고 보는 남자 (또는 한 시대)의 에로티시즘은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p. 9~10

‘장’의 제목만으로도 재미있는 부분들이 있는데, 이런 것들도 있다.

/온 데
울려 퍼지는,
탁자에
주먹 내리치는 소리/
이 제목은 특히나 독특해서, 웃게 되었다. 제목을 이렇게 짓다니!

/몹시 언짢은
기분으로 라몽이
칵테일파티에 도착한다/

/라몽은
알랭과
배꼽의 시대에 대해
논한다/

이렇게 소설들은 하나의 상황에 대한 ‘장’과 두세페이지 내외의 이야기를 가진 짧은 호흡으로 진행된다. 구성이 참 재미있고 계속계속 읽고싶게 만드는 소설이었다. 그리고 가끔 등장하는 쿤데라의 개입도 재미있다.

천천히 집으로 돌아오면서 알랭이 아가시들을 자세히 보니 아주 짧은 티셔츠 차림에 바지는 모두 아슬아슬하게 골반에 걸쳐져서 배꼽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아가씨들이 남자를 유혹하는 힘이 이제는 허벅지도 엉덩이도 가슴도 아닌, 몸 한 가운데의 둥글고 작은 구멍에 총집중돼 있단 말인가.
내가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고? 이 소설 첫머리에 쓴 것과 똑같은 단어들로 이번 장을 시작하고 있다고? 나도 안다. 알랭이 배꼽의 수수께끼에 열중해 있다는 말을 이미 했지만 그래도 나는, 여러분도 몇 년까지는 아니어도 몇 달 동안 같은 문제들(알랭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그 문제보다 분명 훨씬 더 별 볼일 없는 문제들)에 골몰하기도 하듯이, 이 수수께끼가 여전히 그를 사로잡고 있다는 것을 감추고 싶지 않다. p.47

여러가지 의미있는 이야기들도 많이 있지만, 그것은 나중에 다시 읽으며 떠올려 보기로-

  • Published: 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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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

오랜만에 장편소설을 읽었다.

빨간책방에 나오는 김중혁 소설가가 쓴 소설. 빨책에서 리뷰도 해주고 이런저런 많은 이야기들을 해주어서 그런지 조금 더 재미있게 읽은 것 같기도 하다. 소설을 분석하는 능력은 없어서 그냥 오랜만에 어렵지 않게 재미있게 빨리 읽은 소설 정도의 느낌인데, 이런 종류의 소설은 처음이라 더 즐거웠다. 가끔 이런 소설도 읽어주어야지. 너무 무겁지 않게.

딜리팅이라는 직업이 재미있었는데, 어떻게 보면 사회를 보는 관점을 한 걸음 먼저 나아간 것이 아닌가 싶다. 너무 많이 만들고, 소비하고, 모으고, 버리는 사회이다. 그러다 보니 잊는 것도 많고 정을 덜 주는 것도 많다. 그 속에서 정말 간직하고 싶은게 무얼까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좋고, 반대로 내가 가진 많은 것들은 어쩌면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닐 수도 있게 생각하게도 해준다. 내 방만 둘러봐도, 얼마나 많은 것들이 손때묻지 않은 채로 몇 년 동안 자리를 잡고 있지 않나.

간직한다면, 곧바로 떠오르는 것은 편지와 사진과 필름이 담긴 신발 박스 몇 개 정도. 그리고 바로 책상 주변에 있는 펜이나 선물 받은 몇 가지, 그리고 인형들.

딜리팅을 한다면, 마찬가지로 편지와 사진과 필름이 담긴 신발 박스 몇 개. 그런 관점에서 보면 온라인 상에 떠도는 나의 이야기들과 사진들을 딜리팅 하는 것이 이해가 된다. 하지만 몇 년, 십수 년째 박스안에 있는 물건들은 온라인의 그것들과 가치의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필름과 인화된 사진은 추억이고, 편지는 지난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그런 것들은 훨씬 더, 딜리팅 될 가치가 있다..

  • Published: 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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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의 특권 – 아멜리 노통브 #2

지그리드가 전화를 끊었다.
“올라프가 아니라 당신이 죽은 걸로 되어 버렸군요.”
“그래요, 이제 난 올라프 질더로 살 수밖에 없어요. 물론 당신이 허락해주어야 하겠지만.”

난 내가 소설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소설이 좋다. 잠깐 들어갔다 나왔다. 꿈처럼 난데없는 설정은, 가끔 소설속에서 소설을 쓰게 만든다. 지그리드와 올라프. 꿈처럼 중간과정을 빼먹은 듯한 둘의 모습은 그래서 더 기분이 묘했다. 내가 다른 사람으로 살 수밖에 없다면? 오늘 꿈에 2부가 시작되길.

  • Published: 3 years a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