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고 감성적인 디자이너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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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b Girl – 호프 자런

긴 시간동안 정체된 머릿속에서, 가끔 기회를 만들어 몇 개월간 읽은 책.
평소라면 흥미를 가지며 빨리 읽었을테지만 오래 걸렸다. 그만큼 일상 같았고, 그 안의 글들이 머릿속에 새겨졌다.

마음에 들었던 부분들을 옮겨 적는다.
아래의 내용에서 지은이가 실험실에 대해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고,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얼마나 속속들이 알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물론 아래 내용 이후로도 지은이의 실험실에 대한 이야기는 길게 이어진다.

내 실험실은 손으로 하는 일에 모든 정신을 집중해서 뭔가를 해내는 곳이다. 내 실험실은 내가 움직이고, 서고, 걷고, 앉고, 물건을 가져오고, 나르고, 오르고, 기는 곳이다. 내 실험실은 잠을 이루지 못해도 괜찮은 곳이다. 자는 것 말고도 할 일이 많은 세상이기 때문이다. 내 실험실은 내가 상처받고 다치면 문제가 되는 곳이다.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경고문이 붙어 있고, 규칙이 정해져 있다. 장갑을 끼고, 보호 안경을 쓰고, 발가락을 감싼 신발을 신어서 위험한 실수로부터 나를 방어하는 곳이다. 내 실험실은 내가 필요한 것보다 가진 것이 훨씬 많은 곳이다. 서랍들은 언젠가 필요할지 모르는 물건들로 가득하다. 내 실험실의 모든 물건들은(그것이 아무리 작고 못생겼어도) 존재 이유가 있다. 아직 그 용도를 아무도 알지 못할지라도.
내 실험실은 내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한 죄책감이 내가 해내고 있는 일들로 대체되는 곳이다. 부모님께 전화하지 않은 것, 아직 납부하지 못한 신용카드 고지서, 씻지 않고 쌓아둔 접시들, 면도하지 않은 다리 같은 것들은 숭고한 발견을 위해 실험실에서 하는 작업들과 비교하면 사소하기 그지없는 일이 된다. 내 실험실은 아직 내 안에 있는 어린이가 모습을 드러내는 곳이다. 그곳은 내가 가장 친한 친구와 노는 곳이다. 내 실험실에서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도 안되는 짓을 할 수도 있다. 그곳에서는 1억 년 된 돌을 분석하기 위해 밤을 새워 일할 수도 있다. 아침이 되기 전에 그 돌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 알아내야만 하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면서 나에게 밀어닥친 그 모든 어리둥절하고 달갑지 않은 일들(세금 신고, 자동차 보험, 자궁경부암 검사 등)은 실험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아무 상관도 없어진다. 전화기가 없는 그곳에선 아무도 내게 전화하지 않아도 마음 상하지 않는다. 문은 항상 잠겨있고, 열쇠를 가진 사람은 모두 아는 사람들이다. 바깥 세상이 실험실로 들어올 수 없기 때문에 실험실은 내가 진짜 아닐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p.35-36

아래 내용에서는 과학자들의 생각의 한 켠을 엿볼 수 있다. 용어에 대해서도 과학자들은 어떻게 생각을 하는지, 특히 자신의 작업물에 대한 새로운 이름을 짓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고 숭고하게 대하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일을 진행하고 결과를 내는 자세에 대한 부분은 너무나도 명쾌해서 머릿속에 꼭 담아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추측 대신 가정을. 결정 대신 결론을.

“근데 기계 이름은 뭐라고 지을까?” 성공에 힘을 얻은 빌은 재미있는 축약어를 생각해내는 브레인스토밍을 하고 싶어 했다. “‘니켈을 촉매로 한 불균형 반응’이라는 개념이니까 ‘촉매작용을 하다catalyze’라는 단어에서 CAT을 가져올 수는 있을 것 같아.”
세상의 어느 작가도 과학자들만큼 단어 몇 개를 두고 머리를 쥐어짜지는 않을 것이다. 용어가 가장 중요하다. 우리는 이미 받아들여진 이름으로 물질이나 현상을 식별하고, 보편적으로 합의된 용어를 사용해서 그 물질이나 현상을 묘사하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연구한 다음 배우는 데 몇 년씩 걸리는 암호를 사용해서 연구에 관해 글을 쓴다. 자신이 한 일을 논문으로 쓰면서 우리는 ‘가정’을 하지 절대 ‘추측’하지 않고, ‘결론’을 내리지 절대 그냥 ‘결정’하지 않는다. ‘의미가 있다’는 단어는 너무나 모호해서 쓸모없을 정도지만, 거기에 ‘커다란’이라는 단어를 앞에 붙이면 50만 달러의 연구 기금을 끌어올 수도 있다.
새로운 생물의 종이나, 새로운 무기물, 새로운 소립자, 새로운 분자, 혹은 새로운 은하계에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권리는 어느 과학자든 바라 마지않는 가장 높은 명예이자, 위대한 임무이다. 각각의 과학 분야는 이름 짓는 관습에 적용되는 엄격한 규칙과 전통을 가지고 있다. 지금 막 발견한 새로운 것에 대해 알고 있는 것과,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지식을 총동원한 다음 지금까지의 기억 속에서 자신을 미소 짓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가려내서 현대적이면서도 영구한 이미지를 암시하는 표현을 생각해내면 마침내 그 소중한 대상에 세례명을 붙일 수 있다. 그러고는 이 서투르게 이름 짓는 결과의 작은 부분이라도 앞으로 영원히 변치 않고 받아들여질지 모른다는 가망 없는 염원을 한다. 그러나 그날 밤, 내 머리는 거의 뇌사 상태여서 이런 말잔치를 벌일 기력이 없었다. 집에 가서 자고 싶을 뿐이었다.
p.44

아래 내용은 제주도의 서귀포 자연휴양림 깊숙한 벤치에서 읽었다. 키 큰 나무들의 숲 속에서 읽고 있으니, 나무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숲이 정말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장을 읽고서 산책을 하다가 바위틈에 뿌리를 내린 도토리 열매를 보았는데, 그 녀석이 과연 잘 성장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응원을 하고 왔다.

첫 뿌리가 감수하는 위험만큼 더 두려운 것은 없다. 운이 좋은 뿌리는 결국 물을 찾겠지만 첫 뿌리의 첫 임무는 닻을 내리는 것이다. 닻을 내려 떡잎을 한곳에 고정시키는 순간부터 그때까지 누리던 수동적인 이동 생활에 영원히 종지부를 찍게 된다. 일단 첫 뿌리를 뻗고 나면 그 식물은 덜 추운 곳으로, 덜 건조한 곳으로, 덜 위험한 곳으로 옮길 희망(그 희망이 아무리 미약한 것이었다 할지라도)을 포기해야한다. 서리와 가뭄과 굶주린 입이 찾아와도 그로부터 도망갈 가능성 없이 모든 것을 직면해야 한다. 그 작은 뿌리는 자기가 앉아 있는 그 장소에 몇 년, 수십 년, 혹은 수백 년의 미래에 어떤 일이 생길지를 점칠 기회를 딱 한번 가진다. 뿌리는 그 순간의 빛과 습도를 감지하고 자기 속에 내재된 프로그램으로 그 정보를 점검한 다음 글자 그대로 몸을 던져 뛰어든다.
종피(씨의 껍질)에서 첫 배축(식물의 배에서 중심축을 이루는 부분-옮긴디) 세포가 자라나는 순간 모든 것을 건 도박이 시작된다. 싹이 자라기 전에 뿌리가 먼저 내리기 시작하기 때문에 엽록소에서 양분을 만들어내기까지는 며칠, 때로는 몇 주를 기다려야 한다. 뿌리를 내리는 작업은 씨 안에 들어 있던 마지막 양분을 모두 소진시킨다. 모든 것을 건 도박이고, 거기서 실패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성공할 확률은 100만분의 1도 되지 않는다.
p.81

아래 내용은 꼭 사람의 삶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명은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 그리고 스트레스는 위기가 아니라 삶의 순환에서 일상적으로 겪는 문제의 일부일 뿐이라는 것. 대신 사람은 가능한 범위 내에서 발을 움직여, 생각을 움직여 이동을 할 수 있다. 그것에라도 감사해야 하겠다.
그리고 식물들은, 선인장은 항상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자랄 수 있는 해에만 자란다는 것. 나는 환경은 그렇게 주어지지 않는데 너무 성장해야한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게 도태일까.

선인장은 사막이 좋아서 사막에 사는 것이 아니라 사막이 선인장을 아직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사는 것이다. 사막에 사는 식물은 어떤 식물이라도 사막에서 가지고 나오면 더 잘 자란다. 사막은 나쁜 동네와 많은 면에서 비슷하다. 거기서 사는 사람은 다른 곳으로 갈 수가 없어서 거기 사는 것이다. 물은 너무 적고, 빛은 너무 많고, 온도는 너무 높은 상태. 사막은 이 모든 불편한 조건을 극대화해서 가지고 있는 곳이다. 생물학자들은 사막을 많이 연구하지 않는다. 식물이 인간 사회에 가지는 의미는 세 가지뿐이기 때문이다. 식량, 의약품, 목재. 이 세 가지 중 어느 것도 사막에서는 얻을 수가 없다. 그래서 사막 식물을 연구하는 과학자는 정말 흔치 않고, 그렇게 하는 과학자는 종국에 가서는 자기 분야의 비참함에 이골이 나고 만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런 고통을 날마다 견뎌낼 자신이 없다.
사막에서는 생명을 위협하는 스트레스는 위기가 아니다, 그것은 삶의 순환에서 일상적으로 겪는 문제의 일부일 뿐이다. 극도의 스트레스는 환경의 일부일 뿐이지 식물이 피할 수 있거나 개선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선인장의 생존 여부는 치명적인 극도의 건기를 반복적으로 견뎌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무릎까지 오는 정도 키의 원통 선인장이면 적어도 25세 이상 된 녀석이다. 선인장들은 사막에서 천천히 자란다. 그것도 자랄 수 있는 해에만.
p.203

아래 내용은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모두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주었다. 가끔 글을 읽다가 혹은 문득 생각이 나서 떠올리게 되는 경우들이 있지만 항상 머릿속에 담아두지는 못한다. 나무는 서로에 대한 감정과 관심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동물들도 마찬가지고, 물론 사람 사이에도 마찬가지고, 겹겹이 쌓인 다양한 감정과 생각들이 서로 다른 범위에서 상호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몇 년에 걸친 관찰 끝에 연구원들은 위의 현상을 설명하는데 땅 위의 신호체계가 가장 설득력 있는 가설이라고 결론지었다. 과학자들도 나무들이 사람이 아니고, 감정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사람에 대한 감정이 없다는 말이다. 우리를 향해서는. 그러나 어쩌면 서로에 대한 감정과 관심은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위기가 닥치면 나무들은 서로를 돌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트카 버드나무 실험은 모든 것을 바꾼 아름답고도 훌륭한 연구의 예다. 문제가 하나 있기는 했다. 그 연구 결과를 사람들이 믿기까지 20년이 넘는 세월이 필요했다는 사실이다.
p.240-241

아래 내용에서 도구에 대한 멋진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사람은 도구를 사용하고, 도구는 사람이 만든다. 요즘 시대에 대부분의 도구들은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일반적으로 쓰일 수 있는 정형화된 물건들에 가깝다. 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목수는 자신의 도구를 자기가 만들어 사용하고, 신발을 만들거나 가죽으로 물건을 만드는 사람들도 도구나 틀을 자신에 맞게 만들어 사용한다. 디자인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이고, 내가 무엇인가 하는 일에도 마찬가지이다. 어쩌면 간단한 스크립트를 짜서 무언가 나의 일에 도움이 되는 도구를 만들 수 있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 일 것이다.

체중계와 우체국 저울은 서로 다른 방법으로 동일한 목적, 즉 동일한 형태의 측정을 하도록 만들어진 두 가지 다른 기계다. 계속 스펙트럼에 주목해보자. 가령 두 세트의 원자의 무게를 알고 싶고, 중성자가 몇 개 더 들어간 세트 쪽이 얼마나 더 무거운지를 알고 싶다고 하자. 그 무게를 잴 수 있는 기계를 만들어야 한다. 좋은 소식은 이런 기계는 한 번만 만들면 된다는 사실이다. 이런 물건으로 집에서 체중을 잰다든지 정부 기관에서 편지 무게를 재겠다고 우리에게 제작 요청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계는 미워도 되고, 엉뚱해도 되고, 쓰기 불편해도 되고, 비효율적이어도 된다. 그냥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기계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과학 연구를 위한 기구들은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다
필요로 인해 시작된 창조 과정은 무척 재미있고 괴팍한 결과로 이어지고, 그것을 만드는 사람에 따라 독특한 성격을 띤다. 모든 예술 작품과 마찬가지로, 이 과학적 창조물들도 시대의 영향을 받고, 그 시대에 직면한 문제 해결을 시도하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또 모든 예술 작품과 마찬가지로, 과학적 창조물도 그 덕분에 가능해진 미래의 시각에서 보면 구식이고 고물로 보이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하던 일을 멈추고 선배 과학자들의 손길이 닿은 이런 창조물들을 들여다보면 독특한 매력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고, 지엽적인 요소에까지 세심한 신경을 쓴 것을 보고는 점묘화에서 수평선 멀리 있는 작은 배를 표현한 수백 번의 붓 자국을 볼 때와 마찬가지로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p.266-267

아래 내용은 완벽히 공감되지는 않지만, 언젠가는 나도 깨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서 항상 신뢰할 수 있는 한 가지 요소를 찾아내 그것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 어쩌면 생각 일 수도 있고, 자연의 어떤 것일 수도 있고, 누군가 일 수도 있겠다.

북쪽 지방에서 자라는 나무들의 대부분은 겨울 여행을 할 준비를 잘 해내므로, 서리 때문에 죽는 경우는 극도로 드물다. 가을 날씨가 따뜻하건, 춥건 상관없이 경화 과정은 시작된다. 기온의 변화가 아니라 24시간의 순환주기 중 빛이 존재하는 시간이 감소하는 것을 감지해서 낮이 점점 짧아지는 것을 알고, 월동 준비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한 해는 온화했다가 한 해는 혹독했다가 하는 식으로 겨울 기온은 변덕을 부리더라도 가을에 낮이 짧아지는 변화는 해마다 똑같다.
빛을 가지고 한 여러 건의 실험을 통해 이 ‘일광’의 변화가 나무들의 경화 과정을 촉발한다는 것이 증명됐다. 인공 빛을 가지고 나무를 속이면 이 경화 과정은 7월에도 시작될 수 있다. 날씨는 변덕을 부릴 수 있지만, 언제 겨울이 올지 알려주는 태양은 신뢰할 수 있기 때문에 억겁의 세월 동안 나무들은 경화 과정에 의존해 겨울을 날 수 있었다. 식물들은 세상이 급속도로 변화할 때 항상 신뢰할 수 있는 한 가지 요소를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p.276

아래 내용은 살아가면서 지나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든다. 행복과 기쁨, 화, 슬픔과 같은 감정들이 너무 쉽게 스쳐가고 잊혀지는 것이 아닌가. 어떤 것들은 일부러 감정을 억눌러 작은 감정으로 기억되는 것은 아닐까.

빌은 나를 의미심장하게 들여다보는 것으로 내 머릿속에서 벌어지던 대화를 중단시킨 다음 말했다. “모든 걸 잃은 건 아냐. 전부 다 기록했잖아. 다시 시작하면 돼. 생각해보면 이번 여행에서 한 일이 굉장히 많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가지 않아 그의 비행기에 탑승하라는 방송이 나왔고, 나는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 또 내게서 떨어져 나가는 느낌을 그날 두 번째 받았다.
나는 빌의 비행기가 후진을 한 다음 활주로로 가는 것을 보면서 내 인생에서 더 중요한 것일수록 더욱더 말로 표현되지 않고 지나쳐가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는 아일랜드 남서부의 식물분포도를 꺼내서 지형 지도와 비교해가며 이끼를 더 많이 찾을 수 있는 곳을 체계적으로 표시하기 시작했다.
p.360

아래 내용도 살아가는데 잊지 않고 되새기고 싶은 것이었다. 언제나 넘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는 것, 나의 의지와 달리 물러나주어야 할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지속적으로 나를, 주변을, 관계를 가꾸어주어야 한다는 것.

식물을 다루다 보면 자주 겪는 일이 시작과 끝을 구분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식물은 반으로 갈라놔도 뿌리는 몇 년을 더 살 수 있다. 위를 모두 잘라낸 나무의 둥치는 다시 온전한 나무로 자라기 위한 시도를 매년 하고 또 한다. 둥치 안쪽은 잠든 싹으로 가득하다. 겉에서 보는 것보다 거의 두 배나 되는 싹들이 깨어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싹은 줄기로, 줄기는 잔가지로, 그중 운이 좋은 잔가지는 굵은 가지로 크고, 건강한 굵은 가지는 몇 십 년을 버티면서 결국 이전만큼 녹음이 우거진 나무로 성장한다. 어쩌면 누군가가 베어버리려고 한 것 때문에 더 우거진 나무가 될지도 모른다.
..
그러나 나무는 그것 말고도 다른 데 이 영양분을 써야 할 곳이 많다. 늙은 이파리들을 대체하고, 감염된 곳을 치료하는 약도 만들고, 꽃과 씨앗도 생산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동일한 원자재를 사용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자원이 남아도는 일이라고는 없다. 그런데 이 자원을 찾기 위해 위로 아래로 뻗는 데엔 한계가 있다. 결국 충분한 높이, 충분히 깊게 뻗지 못한 가지와 뿌리는 그 영양분들을 확보하기 위해 쓰는 자원보다 얻을 수 있는 자원이 더 적어지는 시점에 도달하게 된다. 일단 환경의 제한을 넘어서게 되면 나무는 모든 것을 잃는다. 주기적으로 가지치기를 해줘야 나무를 보존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마지 피어시(미국의 소설가, 페미니스트)가 말했듯 삶과 사랑은 버터와 같아서, 둘 다 보존이 되질 않기 때문에 날마다 새로 만들어야 한다.
p.384-385

  • Published: 2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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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

그해 봄에
– 박준

얼마 전 손목에 깊게 그은 당신과
마주 앉아 통닭을 먹는다

당신이 입가를 닦을 때마다
소매 사이로
검고 붉은 테가 내비친다

당신 집에는
물 대신 술이 있고
봄 대신 밤이 있고
당신이 사랑했던 사람 대신 내가 있다

한참이나 말이 없던 내가
처음 던진 질문은
왜 봄에 죽으려 했냐는 것이었다

창밖을 바라보던 당신이
내게 고개를 돌려
그럼 겨울에 죽을 것이냐며 웃었다

마음만으로는 될 수도 없고
꼭 내 마음 같지도 않은 일들이
봄에는 널려 있었다


– 박준

오늘은 지고 없는 찔레에 대해 쓰는 것보다 멀리 있는 그 숲에 대해 쓰는 편이 더 좋을 것입니다 고요 대신 말의 소란함으로 적막을 넓혀가고 있다는 그 숲 말입니다 우리가 오래전 나눈 말들은 버려지지 않고 지금도 그 숲의 깊은 곳으로 허정허정 걸어 들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쯤에는 그해 여름의 말들이 막 도착했을 것이고요 셋이서 함께 장마를 보며 저는 비가 내리는 것이라 했고 그는 비가 날고 있는 것이라 했고 당신은 다만 슬프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그 숲에 대해 더 쓸 것이므로 슬픔에 대해서는 쓰지 않을 것입니다 머지않아 겨울이 오면 그 숲에 ‘아침의 병듦이 낯설지 않다’, ‘아이들은 손이 자주 벤다’ 라는 말도 도착할 것입니다 그 말들은 서로의 머리를 털어줄 것입니다 그러다 겨울의 답서처럼 다시 봄이 고 ‘밥’이나 ‘엄마’나 ‘우리’ 같은 몇 개의 다정한 말들이 숲에 도착할 것입니다 그 먼 발길에 볕과 몇 개의 바람이 섞여들었을 것이나 여전히 그 숲에는 아무도 없으므로 아무도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

 

ing…

  • Published: 2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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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젠가 만난다 – 채사장

지대넓얕을 열심히 들으며, 나와 비슷한 연배인 사람들인데도 지식도 많고 생각도 깊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대화를 듣고 있는 것이 참 좋다는 생각도 했다. 사람들도 잘 만나지 않고, 특히 강연이나 세미나 혹은 모임 같은 것을 적극적으로 가봐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던 나인데, 이 사람들의 강연은 듣고 싶어졌다.

작년 11월에는 독실이의 강연을 들었고, 12월에는 채새장의 북토크를 들었다. 북토크,북콘서트는 뭐지… 라고 생소한 영어를 보며 강연일까? 했는데, 한글로 하면 ‘책 출간 기념 강연’ 정도가 되겠다. 사실 채사장의 책을 읽어본 적은 없었고, 이번에 책을 출간했는지도 몰랐다. 나는 채사장을 직접 만나 채사장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을 뿐이었다. 북토크는 책 예약구매자에 한해 추첨을 통해 초대장을 준다고 하여 나는 책을 예약구매 했다.

채사장의 북토크는 자신이 쓰고있는 책들의 전체적인 관계, 그리고 이번에 출간한 책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관계. 나와 타인, 나와 세계, 나와 죽음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와는 정말 거리가 멀었던 단어, 관계.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관계’의 정의보다 훨씬 더 넓은 범위를 생각하는 채사장의 정의가 좋았다. 책에서 마음에 들었던 부분들을 아래 적는다.

세계와 자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원인과 결과, 선과 후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근원인 동시에 결과가 된다.

세계에 대한 두 가지 견해가 있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세계가 자아와는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반면 다른 이들은 세계가 자아와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주관에 의해 해석된 무엇이라고 본다. 일반적으로는 첫 번째 부류의 사람을 ‘실재론자’로, 두 번째 부류의 사람을 ‘관념론자’로 이름 붙여서 구분짓는다. 하지만 내가 궁금한 것은 이러한 용어로의 분류가 아니라 당신의 생각이다. 당신은 어떤 관점이 타당하다고 생각하는가? 지금까지 어떤 세계관을 당연하다고 믿으며 살아왔는가?
p.32

 

‘세계’는 언제나 ‘자아의 세계’다. 객관적이고 독립된 세계는 나에게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 나는 내가 해석한 세계에 갇혀 산다. 이러한 자아의 주관적 세계, 이 세계의 이름이 ‘지평,horizon’이다. 지평은 보통 수평선이나 지평선을 말하지만, 서양철학에서는 이러한 의미를 조금 더 확장해 자아의 세계가 갖는 범위로 사용한다.
즉, 지평은 나의 범위인 동시에 세계의 범위다. 우리는 각자의 지평에서 산다.
그러므로 만남이란 놀라운 사건이다. 너와 나의 만남은 단순히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넘어선다. 그것은 차라리 세계와 세계의 충돌에 가깝다. 너를 안는다는 것은 나의 둥근 원 안으로 너의 원이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감내하는 것이며, 너의 세계의 파도가 내 세계의 해안을 잠식하는 것을 견뎌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일 거다. 폭풍 같은 시간을 함께ㅔ하고 결국은 다시 혼자가 된 사람의 눈동자가 더 깊어진 까닭은. 이제 그의 세계는 휩쓸고 지나간 다른 세계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더 풍요로워지며, 그렇기에 더욱 아름다워진다.
헤어짐이 반드시 안타까운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실패도, 낭비도 아니다. 시간이 흘러 마음의 파도가 가라앉았을 때, 내 세계의 해안을 따라 한번 걸어보라. 그곳에는 그의 세계가 남겨놓은 시간과 이야기와 성숙과 이해가 조개껍질이 되어 모래사장을 보석처럼 빛나게 하고 있을 테니.
p.33-34

 

하지만 상식적인 시간관은 ‘나’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나 이외의 모든 것, 즉 사물, 동물, 타인은 원인과 결과라는 시간의 법칙에 얽매여 있지만, 나 자신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나의 시간은 중첩되고 역행하며 드러난다. 실제로 그렇지 않은가? 나에게는 미래가 현재의 원인이기도 하고 과거가 현재의 결과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보자. 여기 미래의 성공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의 내면에서 원인이 되는 시간은 무엇인가? 그것은 미래다. 미래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현재는 미래의 결과물이 되는 것이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자아의 내면세계에서 시간은 우리의 상식처럼 하나의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겉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사람은 자기만의 시간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어떤 이는 현재에 살지만 다른 이는 과거에 살고, 또 다른 이는 미래에 산다.
p.98-99

 

우리는 세계를 점검해봐야 한다. 나의 세계 안에는 무엇이 있고, 밖에는 무엇이 있는지. 혹시 나는 고집스레 단일한 진리관을 움켜쥐고 빈곤하게도 이것만으로 평생을 살아가려고 작정했던 것은 아닌지를. 또한 외부의 내가 모르는 많은 것을 단순히 비진리라 규정해버림으로써 그것을 안 봐도 괜찮은 것들이라고 스스로 위안했던 것은 아닌지를. 당신이 진정으로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이라면 점검해봐야 한다.
당신과 나 그리고 우리의 세계가 흑과 백으로 칠해진 것이 아니라, 다채로운 색깔로 빛나게 되기를 기대한다.
p.156-157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는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질문하거나, 질문의 한계를 인식하지 못한 채 질문한다. 나는 특히 인류가 오랜 시간 고민해왔던 중요한 질문일수록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렇지 않은가? 의심이 오래될수록 의심이 실제처럼 느껴지듯, 질문이 오래될수록 질문은 그럴듯하게 느껴지는 법이다.
p.230

  • Published: 10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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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아홉 생일, 1년 후 죽기로 결심했다 – 하야마 아마리

쉬는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라는 생각으로 지내고 있지만, 사실 마음 한켠에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눠야지’, ‘책을 많이 읽어야지’, ‘영화를 많이 봐야지’, ‘무언가 만들어야지’라는 희망사항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그 중 하나, 책을 읽겠다고 한 것 중 목록에 있던 한 책을 읽었다. 동료가 최근에 인상깊게 읽었다고 했던 ‘스물아홉 생일, 1년 후 죽기로 결심했다’. 약 두시간 만에 다 읽을 정도로 재미있었고, 쉽게 읽히는 책이었다.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구매를 했는데, 분류가 소설이 아닌 에세이로 되어있었다. 소설인줄 알고 있었는데… 하고 보니, 필명을 따로 쓰는 작가의 실제의 이야기를 에세이 형식으로 풀어낸 책이었다.

초반 부에서, 작가는 자신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는 스물아홉이다.
나는 뚱뚱하고 못생겼다.
나는 혼자다.
나는 취미도, 특기도 없다.
나는 매일 벌벌 떨면서 간신히 입에 풀칠할 만큼만 벌고 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내가 이렇게도 형편없는 인간이었나?
처음엔 물이 뜨겁지 않았다. 그래서 괜찮은 줄 알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내가 끓는 물에 들어온 개구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현재의 삶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진 것이다.

 

이야기는 대략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작가는 자신을 어렸을 때부터 ‘하고싶은 게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외모도 보잘 것 없는 여성, 하루하루 먹고사는데에도 힘겨운 인생이라고 생각하며 지냈다. 그러던 자신의 29살 생일 날, 자살을 하려고 생각하다가 포기하고 있는 와중에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화려한 라스베이거스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어차피 죽을 거라면 단 한번이라도 저 꿈같은 세상에서 손톱만큼의 미련도 남김없이 남은 생을 호화롭게 살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작가는 1년동안 열심히 돈을 모아서 며칠만이라도 라스베이거스에서 호화롭게 살고, 서른이 되는 다음 생일 날 목숨을 끊기로 한다.
이렇게 마음먹은 뒤부터 작가는 낮에는 일반 회사의 파견직원, 밤에는 긴자에서 호스티스 생활을 하고, 주말에는 누드 모델을 하게 된다. 그렇게 1년을 지내며 예전엔 없었던 진정한 친구들을 사귀게 되고, 다양한 꿈을 꾸며 열심히 살아가는 호스티스 친구들과 동창 친구의 모습을 보기도 하고, 상류사회의 체험이나 여러 연륜있는 사람들을 만나며 다양한 경험과 다양한 인생을 보게 된다.
그렇게 1년을 보낸 뒤, 작가는 라스베이거스로 떠나 며칠간의 호화로운 생활과 도박을 하고, 서른이 된 날 아침, 결국 자신이 가져온 돈 보다 5달러를 더 땄다는 것을 알게 된다. 원래는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하려고 했지만, 작가는 그 5달러를 보며 다시 마음을 다잡고 일어나 결국은 성공한 커리어 우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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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야기는 좀 뻔할 수 있지만 책은 전체적으로 재미있고 의미있게 생각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실제의 일이었다는 것과, 의미있는 하나하나의 이야기들을 풀어내며 직접적으로 ‘여기가 새겨들어야 할 곳이야’를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선문답 같은 자기계발서나 이야기를 흥미있게 풀어내는 소설이 아닌 그 중간지점의 느낌이었다. 어찌보면 술을 마시며 옆에 있는 누군가 자신의 경험에 대해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 주듯이. 그리고 작가는 그것이 ‘어때, 대단하지?’ 라고 들려주기 보다는, ‘나는 이때 이렇게 느꼈어’ 라고 이야기하는 듯 하다. 응원의 마음이 조금 들기도 하고, 소설같은 흥미로움, 짜릿함도 느껴졌다.
그리고 책에서 가장 중요하게 이야기하려는 것들도 ‘목표에 도달하고 나서’ 보다는 목표에 도달하기까지의 여러가지 경험들과 생각들, 깨우치게 된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 책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목표지점’을 설정하고 나서 삶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목표가 없는 삶에서 자신이 나약했었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개개인의 삶에서 실제로 이런 경험을 하기는 쉽지 않다. 술을 마시며 옆사람이 들려주었다면 ‘진짜? 대단한 사람이네’라고 생각할 정도로 정작 나는 쉽게 마음먹기 힘들다. 1년동안의 작가의 삶도 언뜻 생각해보면 힘들긴 했지만 호스티스라는 생활을 무사히 잘 거쳐간 것이 신기할 정도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대단한 사람’이 될 수는 정말 없을까? 라고 생각을 해보게 된다. 초반부에 나왔던, 끓는 물에 들어온 개구리의 이야기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끊임없이 인용되는 이유는, 인간의 삶에 그런 부분들이 많아서가 아닐까. 그와 같은 맥락에서, 소설에 나온 인도 요리사 친구가 했던 말이 마음에 들었다. 머릿속에서 먼지에 덮여있던 종이에 바람을 훅 불어준 것처럼.

“평생의 꿈을 가로막는 건 시련이 아니라 안정인 것 같아. 현재의 안정적인 생활을 추가하다 보면 결국 그저 그런 삶으로 끝나겠지.”

  • Published: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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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수필

꽃송이 같은 첫눈 – 강경애

오늘은 아침부터 해가 안 나는지 마치 촛불을 켜대는 것처럼 발갛게 피어오르던 우리 방 앞문이 종일 컴컴했다. 그리고 이따금식 문풍지가 우룽룽 우룽룽 했다. 잔기침 소리가 나며 마을 갔던 어머니가 들어오신다.

“어머니, 어디 갔댔어?”
바느질하던 손을 멈추고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치마폭에 풍겨 들어온 산뜻한 찬 공기며 발개진 코끝.
“에이, 춥다.”
어머니는 화로를 마주앉으며 부저로 손끝이 발개지도록 불을 헤치신다.
“잔칫집에 갔댔다.”
“응. 잔치 잘해?”
“잘하더구나.”
“색시 고와?”
“쓸 만하더라.”
무심히 나는 어머님의 머리를 쳐다보니 물방울이 방울방울 서렸다.
“비 와요?”
“비는 왜, 눈이 오는데.”
“눈? 벌써 눈이 와. 어디.”
어린애처럼 뛰어 일어나자 손끝이 따끔해서 굽어보니 바늘이 반짝 빛났다.
“에그,, 아파라, 고놈의 바늘.”

나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옥양목 오라기로 손끝을 동이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하늘은 보이지 않고 눈송이로 뽀하다. 그리고 새로 한 수숫대 바자갈피에는 눈이 한 줌이나 두 줌이나 되어 보이도록 쌓인다. 보슬보슬 눈이 내린다. 마치 내 가슴속가지도 눈이 내리는 듯했다. 그리고 나는 듯 마는 듯한 냄새가 나의 코끝을 깨끗하게 한다. 무심히 나는 손끝을 굽어보았다. 하얀 옥양목 위에 발갛게 피가 배었다.
‘너는 언제까지나 바늘과만 싸우려느냐?’
이런 질문이 나도 모르게 내 입속에서 굴러 떨어졌다. 나는 싸늘한 대문에 몸을 기대고 어디를 특별히 바라보는 것도 없이 언제까지나 움직이지 않았다. 꽃송이 같은 눈은 떨어진다, 떨어진다.

『신동아』, 193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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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시원한 이야기. 정지용

그날 밤 더위란 난생처음 당하는 것이었다. 새로 한 시가 지나면 웬만할까 한 것이 웬걸 두 시 세 시가 되어도 한결같이 찌는 것이었다. 설령 바람 한 점이 있기로서니 무엇에 쓸까만 끝끝내 바람 한 점이 없었다. 신을 끌고 나가서 뜰 앞에 선 나무 밑으로 갔다. 잎알 하나 옴칫 아니 하는 것이었다. 옴칫거리나 아니하나 볼까 하고 갸웃거려 보았다. 죽은 고기 새끼 떼처럼 차라리 떠 있는 것이었다. 나무도 더워서 죽은 것이었던가? 숨도 막혔거니와 기가 막혀서 가지를 흔들어 보았다. 흔들리기는 흔들리는 것이었다. 마음이 적이 놓이는 것이었다. 참고 살기로 했다. 아무리 덥다 해도 제철이 오고 보면 이 나무에 새로운 바람이 깃들 것이겠기에!

『정지용전집』, 민음사, 1988에서 재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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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 김동인

무슨 글자를 보느라고 옥편을 뒤적이다 별 성星 자를 보았다. 성 자를 보고 생각하는 동안 문득 별에 대한 정다움이 마음속에 일어났다. 별을 못 본 지 얼마나 오래됐는지 별의 빛깔조차 기억에 희미하다. 보려면 오늘 저녁이라도 뜰에 나가서 하늘을 우러러보면 있을 건이건만. 

밤길을 다니는 일이 적은 나요, 더구나 밤길을 다닌다 하여도 위를 우러러보는 일이 적은 데다가 고층 건물이 즐비하고 전등불이 휘황찬란한 도회지에 사는 탓으로 참 별을 우러러본 기억이 요연하다. 물론 그 사이에도 무의식적으로 별을 본 일이 있기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별을 본다’는 의식을 가지지 않고 보았겠는지라 별을 의식한 기억이 까마득하다.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별 셋, 나 셋!” 

여름날 뜰에 누워서 목청을 높이며 세어 나가던 그 시절의 별이나 지금의 별이나 변함은 없을 것이며 그 뒤 중학 시절에 음울한 소년이 탄식으로 우러러보던 그 시절의 별이나 역시 변함은 없을 것이며, 또한 그 뒤 장성하여 시적 흥취에 넘친 청년이 마상이를 대동강에 띄워 놓고 거기 누워서 물결 소리를 들으면서 찬미하던 그 별과 지금의 별이 변함이 없으련만. 그리고 그 시절에는 날이 흐려서 하루 이틀만 별이 안 보이더라도 마음이 초조하여 마치 사랑을 따르는 처녀와 같이 안타까워하였거늘 지금 이렇듯 별의 빛깔조차 잊어버리도록 오래 별을 보지 않고도 그다지 부족함을 느끼지 않고 살아가는 이 심경은 어찌 된 셈일까. 

세상만사에 대하여 이젠 흥분과 감동을 잊었나. 혹은 별을 보고 싶은 감정이 생기지 않을 만큼 현대인의 감정이란 빽빽하고 기계적인 것인가. 지금도 별을 우러러보면 옛날의 그 시절과 같이 괴롭고도 즐거운 감동에 잠길 수가 있을까. 그렇지 않으면 전등만큼 밝지 못한 것이라고 경멸해 버릴 만큼 마음이 변했을까. 

지금 생각으로는 오늘 저녁에는 꼭 다시 별을 우러러보려 한다. 그러나 저녁이 되어도 그냥 이 마음이 그대로 있을지부터가 의문이다. 날이 춥다는 핑계가 있고, 바쁜 원고가 많다는 핑계가 있고, 그 위에 오늘이 음력 팔일이니 그믐 별이 아니고야 무슨 흥취가 있겠느냐는 핑계도 있고 하니 어찌 될는지 의문이다. 

보면 새고 안 보면 문득 솟아오르던 별. 저 별은 장가를 가지 않는가하고 긴 밤을 지키고 있던 별. 내 별 네 별 하며 동생과 그 광휘를 경쟁하던 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언제 다시 잠 못 자는 한밤을 별을 우러러보며 새우고 싶다. 그러나 현 시대의 생활과 감장이 너무 복잡다단함을 어찌하랴. 별을 쌀알로 보고 싶을 터이며 달을 금덩이로 보고 싶을 테니까 이런 감정으로는 본다 한들 아무 감흥도 없을 것이다.

1935.2. 조선문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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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 독거기 – 나혜석

나를 그토록 위해 주는 고마운 친구의 집 근처, 돈 이 원을 주고 토방을 얻었다. 빈대가 물고 벼룩이 뜯고 모기가 갈퀸다. 어두컴컴한 이 방이 나는 싫었다. 그러나 시원하고 조용한 이 방이야말로 나의 천당이 될 줄이야.

사람 없고 변함없는 산중 생활이야말로 싫증나기 쉽다. 그러나 나는 이미 삼 년 째 이런 생활에 단련을 받아 왔다. 그리하여 내 기분을 순환시키기에는 넉넉한 수양이 있다. 나무 밑에 자리를 깔고 드러누워 책보기, 울가에 평상을 놓고 거기 발을 담그고 앉아 공상하기, 때로는 물에 뛰어들어 헤엄치기, 바위 위에 누워 낮잠 자기, 풀속으로 다니며 노래도 부르고, 가경을 따라가 스케치도 하고, 주인 딸 동리 처녀를 따라 버섯도 따러 가고, 주인 마누라 따라 콩도 꺾으러 가고, 동자童子 앞세우고 참외도 사러 가고, 어치렁어치렁 편지도 부치러 가고, 높은 베개 베고 소설도 읽고 전문 잡지도 보고, 뜨뜻한 방에 배를 깔고 엎드려 원고도 쓰고, 촛불 아래 편지도 쓰고, 때로는 담배 피워 물고 희망도 그려보고, 달 밝거나 캄캄한 밤이거나 잠 아니 올 때 과거도 회상하고 현재도 생각하고 미래도 계획한다.

고적孤寂이 슬프다고? 아니다. 고적은 재미있는 것이다. 말벗이 아쉽다고? 아니다. 자연과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나는 평온무사하고 유화柔和한 성격으로 변할 수 있었다. 그러기에 촌사람들은 내가 사람 좋다고 저녁 먹은 후에는 어린 것을 업고 옹기종기 내 방 문 앞에 모여들고, 주인 마누라는 옥수수며 감자며 수수 이삭이며 머루며 버섯을 주워서 구메구메 끼워 먹이려고 애를 쓰고, 일하다가 한참씩 내 방에 와 드러누워 수수께끼를 하고 허허 웃고 나간다.

여기 말해 둘 것은, 삼 년째 이런 생활을 해본 경험상 여자 홀로 남의 집에 들어 상당히 존경을 받고 한 달이나 두 달이나 지내기가 용이한 일이 아니다. 더구나 임자 없는 독신 여자라고 소문도 듣고 개미 하나도 들여다보는 사람 없는, 젊도 늙도 않은 독신 여자의 기신奇身이랴.

우선 신용 있는 것은 남자의 방문이 없이 늘 혼자 있는 것이요, 둘째로는 낮잠 한 번 아니 자고 늘 쓰거나 그리거나 읽는 일을 함이요, 셋째로 딸의 머리도 빗겨 주고 아들의 코도 씻겨 주고 마루 걸레질도 치고 마당도 쓸고 때로는 돈푼 주어 엿도 사먹게 하고 쌀도 팔아오라 하여 떡도 해먹고 다림질도 붙잡아 주고 빨래도 같이하여 어디까지 평등 태도요 교驕가 없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때때로, “가시면 섭섭해 어떻게 하나.” 하는 말은 아무 꾸밈 없는 진정의 말이다. 재작년에 외금강 만산정에서 떠날 때도 주인 마누라가 눈물을 흘리며 내년에 또 오시고 가시거든 편지하세요, 했으며 작년에 총석정 어촌에서 떠날 때도 주인 딸이 울고 쫓아 나오며, “아지매 가는 데 나도 가겠다.”고 했고 금년 여기서도, “겨울 방학에 또 오세요.” 간절히 말한다.

오면 누가 반가워하며 가면 누가 섭섭해하리, 하고 한숨을 짓다가도 여름마다 당하는 진정한 애정을 맛볼 때마다 그것이 내 생에 무슨 상관이 있으랴 하면서도 공연히 기쁘고 만족을 느낀다.

– 『삼천리』 1934. 7.

  • Published: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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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름을 지어다 며칠은 먹었다. 박준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이상한 뜻이 없는 나의 생계는 간결할 수 있다 오늘 저녁부터 바람이 차가워진다거나 내일은 비가 올 거라 말해주는 사람들을 새로 사귀어야 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이의 자서전을 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익숙한 문장들이 손목을 잡고 내 일기로 데려가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찬비는 자란 물이끼를 더 자라게 하고 얻어 입은 외투의 색을 흰 속옷에 묻히기도 했다’라고 그 사람의 자서전에 쓰고 나서 ‘아픈 내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는 문장을 내 일기장에 이어 적었다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워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_
좋더라.

미신

올해는 삼재였다

밥을 먹을 때마다
혀를 깨물었다

나는 학생도 그만하고
어려지는, 어려지는 애인을 만나
잔디밭에서 신을 벗고 놀았다

두 다리를 뻗어
발과 발을 맞대본 사이는

서로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는 말을
어린 애인에게 들었다

나는 빈 가위질을 하면
운이 안 좋다 하거나

새 가구를 들여놓을 때도
뒤편에 왕자를 적어놓아야
한다는 것들을 말해주었다

클로버를 찾는
애인의 작은 손이
바빠지고 있었다

나는 애인의 손바닥,
애정선 어딘가 걸쳐있는
희끄무레한 잔금처럼 누워

아직 뜨지 않는 칠월 하늘의
점성술 같은 것들을
생각해보고 있었다.

_
스무살, 멋모르고 밥을 얻어먹다가
시 동아리에 들어갔다.

누군가의 몇년 전
누군가의 십수년 전
누군가의 몇십년 전.

3월에는 매일 밥을 얻어먹고, 금요일에는 시평회를 하고(술을 마시고), 가을에는 시화전을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시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이런 시는 마음에 닿는다. 아마 그때는 이해하기 어려운 시를 찾아다녔던 것 같다.

그래도 아직 이런 시를 읽고 마음이 울리는 것을 보니, 기계가 되지는 않았나보다. 요즘의 걱정이다.

  • Published: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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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의 심리학 – 로버트 치알디니

설득의 심리학 – 로버트 치알디니

  • 상호성의 법칙
  • 일관성의 법칙
  • 사회적 증거의 법칙
  • 호감의 법칙
  • 권위의 법칙
  • 희귀성의 법칙

오랫동안 읽었던 책을 드디어 다 읽었다. 사실 나랑은 잘 안맞는 책이다 싶어서 중간에 중단할까 생각도 했는데, 이미 시작한 거 끝까지 읽자는 마음으로 읽었다. 몇 년 뒤 다시 읽으면 다를까? 마음에 들었던 부분을 따로 기록해두지 않아서 남은 것은 없지만, 다 읽고나니 책의 목차가 그대로 이 책의 이야기이며 기억해두어야 할 지식었다. 따라서, 목차를 남겨둔다.

이 책은 사람들을 설득시키는 법칙에 대한 설명과 다양한 사례를 들고 있는데, 지은이가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은 이 법칙을 악용하여 불로소득을 취하려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누군가 나도 모르게 나를 끌게 만드는 방식을 취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그것이 악의적인 것인지 합당한 것인지를 판단하도록 일깨워주는 지식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설득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려주는 지식이다.

지은이는 다양한 연구와 사례를 들어 재미있게 설득의 법칙들을 설명하는데(그런데도 왜이리 지루했을까), 이런 형태로 자신의 주장이나 지식을 전달하는 방법은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 한편으로는 다양한 경험과 다양한 이야기들, 역사들을 안다면 이런 ‘법칙’이 아니더라도 개개인이 이미 체화하여 사용하고 있거나, 다른 표현으로 지식화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나는 이런 분야에 대해 전혀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껏 뭐하고 살았나 싶기도 하고, 잘 기억해두고 삶을 사는데 있어서 유용하게 써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디자인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1. 상호성의 법칙

상호성의 비밀

  • 상대방을 빚진 상태로 만들어라
  • 원치 않는 호의에도 빚진 감정은 생겨난다
  •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

상호성의 속임수

상호성을 이용한 일보 후퇴, 이보 전진 전략

  • 워터게이트 사건은 상호성과 대조효과가 낳은 비극
  • 먼저 무리하게 요구하라
  • 책임감과 만족감을 불러일으켜라

상호성의 법칙에 대항하는 자기 방어 전략

  • 호의와 술책을 구분하라
  •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응하라

2. 일관성의 법칙

기계화된 일관성의 함정

  • 한번 선택한 것은 버리기 아깝다
  • 약속은 약속을 낳는다

개입과 일관성의 심리전

작은 약속부터 시작하는 문전 걸치기 기법

미군 조종에 성공한 중공군의 세뇌 프로그램

  • 자발적 개입을 증명할 기록을 남긴다
  • 공식적인 약속은 생명력이 길다

자녀 교육시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

일관성의 근거를 만드는 미끼 기법

  • 승낙이 이루어지면 미끼를 제거한다

일관성의 법칙에 대항하는 자기 방어 전략

  • 본능적인 거부감에 따라 행동한다
  • 처음에 자신이 의도했던 바를 되돌아본다

3. 사회적 증거의 법칙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가짜 웃음을 들려주는 이유

  • 다른 사람의 행동에 의해서 더 쉽게 설득된다

사이비 종교에 빠지는 이유

‘다수의 무지’가 불러온 길거리 살인사건

  • 구경꾼은 결코 도와주지 않는다
  • 오직 한 사람만을 선택하라

유사성의 영향력

  • 불확실성과 유사성이 빚어낸 인민사원의 집단자살

사회적 증거의 법칙에 대항하는 자기 방어전략

  • 조작된 사회적 증거에 대해서는 반격을 가하라
  • 과정상의 오류를 점검하라

4. 호감의 법칙

호감의 법칙을 이용한 판매전략

  • 친구의 부탁은 거절하기 힘들다
  • 자동차 판매왕의 비결

호감의 원천

  • 신체적 매력에 끌린다
  • 사소한 공통점에도 호감을 갖는다
  • 칭찬해주는 사람을 좋아한다

호감의 법칙을 활용한 집단간의 갈등 극복

  • 접촉이론 : 익숙해지면 좋아진다
  • 협동을 통한 학습 : 공동의 목표를 제공한다
  • 상호협력은 호감을 크게 만든다
  • 착한경찰, 나쁜경찰 전략

연상작용의 엇갈리는 명암

  • 만찬 기법 : 좋은 이미지와 연결시켜라
  • 타인의 성공에서도 대리만족을 느낀다

호감의 법칙에 대항하는 자기 방어 전략

5. 권위의 법칙

밀그럼의 실험 : 권위에 대한 맹종

아브라함은 왜 아들을 죽이려 했는가

권위의 상징물들

  • 직함은 권위를 대변해준다
  • 옷차림에 따라 대우가 달라진다
  • 고급자동차에 더 관대하다

권위의 법칙에 대항하는 자기 방어 전략

  • 전문가가 맞는지 살펴본다
  • 전문성과 트릭을 구별하라

6. 희귀성의 법칙

희귀성의 가치

  • 한정판매 : “얼마 없습니다!”
  • 시간제한 : “이제 곧 끝납니다!”

상실에 대한 두려움

  • 제한된 자유에 대한 심리적 저항
  • 세 살바기의 이유있는 반항

로미오와 줄리엣 효과

  • 로미오와 줄리엣이 3일 만에 사랑에 빠진 이유
  • 금지법이 만들어낸 희귀한 세제
  • 금지하면 더 하고 싶다

희귀성의 영향력을 강화시키는 조건

  • 갑작스런 희귀성이 혁명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 희귀성이 경쟁심리를 부추긴다

희귀성의 법칙에 대항하는 자기 방어 전략

  • 흥분하지 말라
  • 득실을 냉정히 따져보라
  • Published: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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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 알베르트 까뮈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소설을 읽었다. 알고 있는 것이라면 아주 유명한 소설이라는 것. 다 읽고 나니 100쪽 정도의 짧은 소설이었고, 그 뒤에 ‘부조리 문학’이라는 짧은 설명이 있었다.

지난 주말과 이번 주말 오후, 인도 구루가온의 아파트의 베란다에서 햇살을 맞으며 읽었는데 괜찮은 선택이었다. 지하철 형광등 아래 서서 읽는 것보단 훨씬 이야기와 어울렸다.

소설을 다 읽을 때까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깊게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저 이야기를 따라가고 글자로 적힌 풍경들을 머릿속에 그리며 읽어갔다. 표현들이 워낙 사실적이어서 그 풍경을 따라 한줄한줄 읽는 것이 흥미진진했다. 마치 영화처럼.

결과적으로 자신의 적극적인 의지 없이 점점 좋지 않은 상태로 빠져들어가는 주인공, 그리고 그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게 옭아매는 법이라는 틀. 연관성이 적어보이는 여러가지 행동과 사건들이 결국 누군가에 의해 하나의 주제로 엮이게 되고 그 사람을 대변하게 된다. 나머지 수많은 일상과 행동과 성격들로 대변할 수 있는 그 사람의 모습은 힘을 잃고 말이다. 결론짓기 어려운 애매모호한 사건이 누군가의 의지에 따라 다른 것들과 엮여져 범죄로 단정지어진다.

마지막에 가서는, 이런 법이라는 것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나? 분명 흑과 백, 이분법으로 무 자르듯 자를 수 없는 이 세상이 어떤 순간엔 옳고 그름, 두 가지로 구분되게 된다. 그렇다면 그릇되었더라도 나는 내 삶을 지켜내겠다. 물론 그렇게 하기는 힘들겠지만.

  • Published: 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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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쏘시개 – 아멜리 노통브

“도대체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이지? 지금이 전쟁 중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모든 것을 허용하는 사람과 춥기 때문에 자신에게 모든 것을 허용하는 여자 사이에 있다니!”

  • Published: 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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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 줄리언 반스

난 소설을 읽어도 소설의 이야기보다 특정한 부분에 심취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에도 그렇다. 그리고 이번 소설은 E-book을 전자도서관에서 대여해서 읽었는데, 대여기간이 끝나서 책갈피 해놓은 부분이 다 사라져 버렸다. 그 중 건진 것.

한 남자가, 밤이 늦어, 살짝 취한 나머지 전 애인에게 편지를 쓴다고 생각해보자. 그가 편지봉투에 주소를 적고, 우표를 붙인 다음, 코트를 찾아 입고 우체통이 있는 곳까지 걸어가서 편지봉투를 밀어넣은 후, 걸어서 집으로 돌아와 잠을 잔다고 말이다. 그가 마지막 과정까지 일사천리로 행동에 옮길 가능성은 거의 없다. 안 그런가? 편지는 다음 날 아침까지도 부치지 않은 채 놓여 있을 것이다. 얼마 안 가서, 아니나 다를까, 생각이 달라진다. 그런 점에서 이메일에는 미덕이 많다. 임의적이고, 즉각적이고, 감정에 대해, 감정상의 결례에 대해서까지 진실되다. 77.48%

옛날 사람들은 편지가 전달될 때까지의 긴 시간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장담하는데, 삼 주 동안 우체배달부를 기다리는 건 사흘동안 이메일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 사흘이 얼마나 길게 느껴졌느냐고? 어지간한 보상으론 성에 차지 않을 만큼 길었다. 베로니카는 놀랍게도 내 메일의 제목 – 안녕, 또 나야. – 을 지우지 않았는데, 그것이 내겐 사뭇 귀엽게 여겨졌다. 78.91%

  • Published: 3 years ago